아이 같은 '어른'과 어른 같은 '아이'의 그해 여름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은 1999년에 개봉한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작품이다. 부모님 없이 할머니와 살고 있는 어른 같은 아이 ‘마사오’와, 누가 봐도 어엿한 어른이지만 사실은 나잇값을 못하고, 철부지 아이 같은 어른 ‘기쿠지로’의 여름 이야기다. 영화는 자고 있는 어린 소년을 둘러싸고 있는 네 명의 천사 그림으로 시작한다.
마사오의 아빠는 사고로 돌아가셨고, 엄마는 멀리 일하러 갔다. 여름방학이 시작됐지만, 어린 마사오는 갈 곳이 없어서 우울하다. 할머니가 일하기 전 차려두고 간 밥을 혼자 먹는 마사오. 방과 후 유일한 취미는 축구였는데, 축구교실마저도 방학을 한다고. 안 그래도 울상인 마사오의 표정은 더욱 울상이 된다. 친구들은 그렇게 하나 둘, 부모님과 휴가를 떠나고 동네에 남은 건 마사오뿐. 부모님 생각이 더욱 간절했던 마사오. 그때 집에 도착한 택배. 엄마 아빠의 결혼사진과 할머니, 엄마, 마사오가 함께 찍은 사진이 들어있다. 박스에 붙어있던 엄마의 주소를 발견한 마사오. 곧바로 엄마를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토요하시. 엄마가 있는 도시였다. 그곳으로 가던 중, 마사오는 동네 불량배 형아들에게 돈을 빼앗기는데, 마침 그때 아는 동네 아저씨 ‘기쿠지로’와 아주머니가 나타나 위기에 처한 마사오를 구해준다.
마사오의 사정을 들은 아주머니는, 기쿠지로 아저씨의 손에 돈 5만 엔을 쥐어주며, 마사오의 어머니 집에 함께 다녀오라고 한다. 결국 아저씨와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된 마사오. 그런데... 아저씨는 어린 마사오를 데리고 토요하시는 안 가고, 경륜 도박장으로 향한다. 결국 5만 엔을 다 날리고, 마사오의 돈 2천 엔으로 가까스로 1만 6천 엔을 벌지만 다시 유흥업소에 들어간 아저씨... 마사오는 토요하시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경륜장으로 향해 마사오에게 매일 도박 숫자만 물어보는 기쿠지로ㅠㅠ 도박에 진 탓을 어린 마사오에게 돌리는데... 혼자 꼬치구이를 먹고 나오니 없어진 마사오. 나쁜 아저씨를 만나 위험한 일을 당할 뻔한 찰나! 기쿠지로가 나타나 실컷 패주고 나와, 뺏은 돈으로 택시를 타고 가다가 급기야 택시를 훔치기까지 하는데.. 하지만 택시마저 고장 나서 중간에 걸어 나와, 한 호텔에 묵게 된 둘. 그때 보인 아저씨 등판의 예사롭지 않은, 입가에 피를 묻힌 귀신 그림(야쿠자들이 하는 전통 문신이라고 함)을 보고 놀라는 마사오. 아저씨는 대체 무슨 인생을 살아온 걸까? 확실히 누구랑 싸워서 진 적은 없는 것 같다.
영화를 보면 볼수록, 초등학생인 마사오보다 철이 덜 든 것 같은 기쿠지로를 보면서, 과연 이들은 여행의 종착지인 토요하시까지 무사히 갈 수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온전하지 않은 어른이지만, 자라나는 소년에게는 함께하는 한 명의 어른이 꼭 필요한 나무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게다가 마사오는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엄마의 얼굴을 꼭 보고 싶었고, 앞으로의 인생을 위해서도 엄마의 존재를 확인해야만 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초등학생 혼자 엄마를 찾아가야만 하는 그 험난한 길에 기쿠지로의 존재는 어쩌면 마사오에게 숙명이 아니었을까.
마사오를 보며 아이에게 부모란 꼭 필요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더욱 깨닫게 된다. 수학 문제 하나도 가르쳐주지 못하는 기쿠지로 아저씨지만, 마사오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특별한 방학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영화에 더욱 빠져들었다.
막무가내 기쿠지로 덕분에 호텔 로비보이의 차를 공짜로 얻어 타고, 고속도로 휴게소에 도착한 둘. 히치 하이크를 해서 토요하시까지 가려는 기쿠지로. 마사오를 내세워 한 커플의 차를 얻어 타게 되고, 여자는 마사오에게 날개 달린 가방을 선물로 준다. 어느 시골길에 내리게 된 아저씨와 마사오. 그런 마사오를 돌보며 함께 성장하는 기쿠지로. 엄마를 한 번도 본 적 없다는 마사오의 사연을 그때야 알게 되고, 기쿠지로는 ‘나랑 같은 팔자구나’ 하며 어린 마사오에 대한 애정이 커진다.
우여곡절 끝에, 두 번의 차를 얻어 타고 중간에 내린 둘. 드디어 엄마가 있는 도시까지 도착한다. 드디어 마사오는 엄마가 사는 집을 찾았지만, 명패는 엄마의 이름 ‘스기야마 사토코’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되어있다. 그때 문을 열고 나온 한 가족. 엄마는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마사오보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잘 살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마사오는 울음을 터뜨리고... 생각이 복잡해진 기쿠지로는 바이크 탄 어리바리 청년 둘을 협박해 ‘천사의 종’을 얻어와 마사오에게 건넨다.
“힘들고 슬픈 일이 있을 때, 이 종을 흔들면 천사가 나타나서 도와준대.”
바닷가에서 둘 만의 시간을 보낸 둘. 마사오는 아저씨의 손을 잡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축제에 들린 마사오와 기쿠지로. 기쿠지로는 마사오를 기쁘게 해 주려고 이곳저곳 난동을 피우다가 결국 조직폭력배들에게 크게 맞게 되고... 마사오는 기쿠지로를 밤새 기다린다. 피투성이가 돼서 돌아온 기쿠지로. 기쿠지로를 위해 마사오는 약을 사 오고, 고사리 손으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는 마사오. 그런 마사오를 보며 고마움과 미안함이 동시에 교차하는 기쿠지로.
다음날 배가 고팠던 둘은 옥수수 서리를 하다 들키는데, 마침 밭에서 자신들을 토요하시까지 태워줬던 밀짚모자 남자를 만난다. 셋은 함께 옥수수 판매를 하며 2박 3일간 함께 캠프를 하게 된다. 그때 다시 만나게 된 바이크 형제. 시무룩한 채 낚시하는 마사오를 웃겨주려고 이들은 직접 물고기와 문어 역할까지 하는데... 마사오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인디언, 우주인 흉내를 내며 갖은 노력을 하는 셋의 모습이 마치 천사같이 순수해 보였다.
헤어지던 날, 손 흔들며 인사하던 바이크 형제의 검정 가죽 재킷 뒤에는 독수리 날개가 달려있는 것이 내 눈에 띄었다. 이들은 정말 마사오를 위해 하늘에서 보낸 천사가 아니었을까? 영화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천사는 마사오의 눈앞에 직접 나타나지 않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나 그들을 돕고 있었구나.
비록 온전하지 않고, 덜 떨어지고, 아이보다 더 아이 같은 어른인 기쿠지로여도, 동네 꼬마에 불과한 마사오를 위해 먼 길을 함께 가줘야겠다는 마음을 가진 것 자체가 참 괜찮은 어른이 아닌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돌진하는 기쿠지로의 모습이, 오히려 나쁜 어른과 세상으로부터 마사오를 보호하는 든든한 아버지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고 평가하고 싶다.
마사오와 함께 하며 기쿠지로 역시 많은 것을 배웠다. 둘이 함께 시골 도로를 끝없이 걸을 때도, 인적 없는 버스 정류장에 앉아 간절히 차를 기다릴 때도, 마사오의 엄마에게 인사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려서 눈물을 터트린 마사오를 볼 때도, 이후 바닷가에 앉아 하염없이 함께 앞을 바라볼 때도 기쿠지로는 마사오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봤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기쿠지로 역시 자신의 어머니를 보러 한 양로원에 가게 되고, 멀리서 어머니를 보며 눈시울을 붉힌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원망, 슬픔, 용서 등의 감정이 모두 섞여있던 표정.
가족이지만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마사오와 기쿠지로도 그중 하나다. 하지만, 이들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여름을 함께 보내며 서로에게 지붕이 되어주고, 위로가 되어주고, 진정한 가족이 되어주었다. 마사오도, 기쿠지로도 서로를 통해 뜨거운 가족애를 느낀 잊지 못할 여름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