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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작가 Dec 31. 2020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이해하기

- "언젠간 그를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올 거야."


"한 겨울의 여행이었다.

엄청나게 추웠던 기억이 난다.

너무 추워서 먹었던 라면......"     


바나나 초코, 파란색 렌터카, 수족관, 바다, 부서진 조개껍질, 부서진 전구...

몇 장의 사진들이 지나가고, 사진을 단서로 겨울의 추억을 그리워하는 츠네오의 목소리로 영화는 시작된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2003년 일본에서 처음 개봉됐던 이누도 잇신 감독의 작품이다. 다나베 세이코의 단편 소설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ジョゼ と虎と魚たち)'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지만 결말은 다르고, 국내에서는 2004년에 개봉한 후 일본 로맨스 감성에 열광하는 여성들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이듬해인 2005년, 내가 대학에 입학해 국문과 1학년 여대생으로서의 풋풋함과 설렘이 있던 때, 이 영화를  보게 됐었는데 당시 내 마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영화였다. 사랑에 대한 지극히 현실적인 가치관이랄까.   

  

마작방에서 심야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 츠네오는, 손님들로부터 동네 꼬부랑 할머니가 끌고 다니는 수상한 유모차에 대해 듣게 된다. 바로 그 날, 말로만 듣던 유모차가 언덕에서 굴러와 츠네오 앞에 서게 되고 그 안에 타고 있던 신비스러운 여자, 조제를 처음 만난다. 첫 만남부터 츠네오에게 부엌칼을 휘두르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 조제.         

겉은 강해 보이지만 상처 받기 두려워 세상으로 나오지 못하는 조제는, 하반신 마비라는 장애가 있지만 당차다. 요리를 잘하고, 책 읽기를 좋아하고, 의자에서 다이빙을 하는 소녀. 츠네오는 그런 조제에게 끌리게 된다. 처음 조제를 도와주고 밥을 얻어먹은 그날 이후로 하루가 멀다 하고 조제와 할머니가 사는 집에 드나든다. 밥이 맛있어서, 아니 조제가 좋아서.     

츠네오는 지극히 현실적인 남자다. 영화의 초반부에도 나오지만 굉장히 중성적인 섹스파트너와, 모두가 부러워하는 미모의 퀸카 여친 카나에를 따로 두고 있을 정도로 어장관리 또한 부지런하다. 하지만 치한에게 위험한 일을 몇 번이나 당할 뻔하면서도, 꽃이랑 고양이가 보고 싶어서 산책을 계속하고 싶다는 조제가 어느새 츠네오의 일상이 되어버린다. 단순하지만 특별하고, 치명적이지만 자꾸만 사랑스러운 조제에게 점점 더 끌리게 되는 츠네오.


그런 츠네오가 싫지 않은 조제. 그녀 역시 처음 다가온 사랑에 마음이 흔들리지만, 츠네오의 여친 카나에의 존재를 알고 난 후, 츠네오를 밀어낸다. 그렇게 둘은 잠깐 동안 이별의 시간을 가진다. 하지만 얼마 후, 조제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그녀를 찾아간 츠네오의 방문을 계기로 조제는 츠네오를 붙잡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드러내고,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둘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특별한 시간을 가진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걸 보고 싶었어.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을 때, 안길 수 있으니까.

그런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평생 진짜 호랑이를 볼 수 없다고 생각했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호랑이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고 싶었다는 조제. 얼굴은 무서워 죽겠는데, 츠네오의 손을 꼭 붙잡은 채 뚫어져라 호랑이를 쳐다보던 조제. 강인한 잡초 같아서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을 것 같다고 조제를 지레짐작했던 건 철저히 내 착각이었다. 사실 조제는 옆에 함께 있어줄 누군가가 정말로 필요했구나. 우리는 모두, 누군가가 필요하다.


"언젠간 그를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올 거야.

베르나르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지.

우린 또다시 고독해지고

모든 게 다 그래.

그냥 흘러간 1년의 세월이 있을 뿐이지.     

네, 알아요.

조제가 말했다."     


프랑수와즈 사강의 <일 년 후>라는 소설을 츠네오로부터 받아 들고 기뻐하며, 어린아이처럼 책을 읽던 조제. 이 장면을 처음 볼 때는 격앙된 조제의 목소리만 들렸는데, 이 대목의 진짜 의미가 영화의 후반부가 돼서야 기억이 났다. 이때부터 조제는 알았던 걸까. 언젠가는 둘도 헤어지게 되리란 걸 알면서도 사랑을 시작했던 걸까. 이후 두 사람은 서로의 한계를 서서히 깨닫게 되고, 그 후로도 얼마간은 함께하지만 더 이상 미련이 남지 않을 때쯤 아주 담백한 이별을 한다.      

강렬했던 첫 만남 이후, 사랑하는 츠네오와 함께 호랑이, 물고기 그리고 바다를 보고 싶었다던 조제. 그런 그녀의 모든 것을 사랑한 츠네오. 이별이 다가옴을 눈치챈 조제는 츠네오의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대신 함께 겨울 바다로 향하고, 돌아오는 길 물고기의 성에서 잠든다.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질처럼

혼자 깊은 해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그것도 그런대로

나쁘진 않아."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많은 장면과 대사들이 기억에 남지만, 정말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은, 츠네오의 여친 카나에와 조제의 언덕 위 만남일 것이다. 조제에게 남친을 빼앗긴 카나에의 분노가 극해 달해 조제를 찾아와 뺨을 때리는 카나에. 이에 지지 않고, 자기 얼굴 앞에 조용히 손을 들고 있다가 카나에가 얼굴을 갖다 대자마자 뺨을 후려치는 조제. 카나에의 두 번째 펀치에도 굴하지 않고 다시 얼굴 앞에 손을 올리는 조제를 보며, 카나에는 조용히 물러난다. (얼마 전 개봉한 한국판 영화 <조제>에는 이 장면이 빠져서 매우 아쉬웠다)    

어떻게 보면 한 남자를 사이에 둔 연적끼리의 싸움으로 볼 수 있지만, 이 장면에서 나는 조제라는 캐릭터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벗어날 수 없는 장애를 가진 채, 평생을 집안에서 할머니가 주워 온 고물들과 책과 함께 지낸 여자. 아무도 자기를 이해할 수 없고, 누구도 이해하며 살지 않았던 조제가 운명 같은 사랑을 처음 하게 됐는데 그의 여자였다는 사람이 대뜸 찾아왔다. 그러더니 자신의 남자를 빼앗아간 그 장애가 부럽다며 조제가 악착같이 버텨 온 그늘로 얼룩진 삶을, 한 순간에 부끄럽고 치졸한 애정 무기로 만들어버린 그녀가 내뱉은 칼 같은 말이, 어쩌면 조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상처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결정적인 순간마다 덤덤해지려는 조제의 모습에, 나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일견 츠네오의 여자 문제가 복잡해 보이긴 해도, 그가 조제를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므로. 오히려 너무나 사랑했고, 그래서 진지했고,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었지만 우리에게는 현실적인 문제가 언제나 남아 있으므로. 사랑의 기쁨은 언젠간 사라지지만, 사랑의 책임과 의무는 늘 감당할 몫으로 남게 되므로. 사람은 감성적인 만큼 또 너무나 이성적이라서 슬프게도 그 한계를 일찍 깨달아 버리는 것이 모든 이별의 이유가 아닐까.

 

"담백한 이별이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니, 사실 단 하나뿐이었다.

내가 도망쳤다."      


라고, 독백하는 츠네오의 대사를 보라. 아프지만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 이별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헤어져도 친구로 남기도 하지만

조제는 아니다.

조제를 만날 일은

다신 없을 것이다."     

혼자서 씩씩하게 전동 휠체어를 타고 장을 봐오고, 츠네오가 곁에 있기 전과 다르지 않게... 오늘도 생선을 구워 먹으며 혼자 담담하게 살아가는 조제의 모습을 뒤로한 채 영화는 끝난다. 마지막에 츠네오가 조제를 떠나서 카나에와 길을 걷는 장면에서 갑자기 오열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연출된 장면이 아니라 츠네오 역을 맡은 배우가 진짜 감정에 북받쳐서 울게 된 것이라는 인터뷰를 어느 잡지에서 본 적이 있다. 정말 사랑했기 때문에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슬프게 말고 소중하게 남기고 싶어서, 차마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랑도 이 세상에는 많은가 보다. 우리가 다른 장소, 다른 곳, 다른 시간에 만났어도 사랑했을까?     

내가 좋아하는 故 피천득 시인의 <인연>이라는 글의 마지막 문장들이, 이 영화와 잘 어울려서 아래 적어본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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