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러버
당신은 오늘 하루 몇 번이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았습니까?라는 질문에 정확한 횟수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이나 될까. 그 정도로 스마트폰은 우리 일상에서 1분만 내 눈앞에 띄지 않아도 불안해지는 분신과 같이 되어 버렸다. 2007년 스티브 잡스의 역작, 아이폰의 등장과 함께. 나의 첫 아이폰은 아이폰4였다. 고등학교 때 쓰던 'UTO폰'을 거쳐 '스카이 돌고래폰'을 쓰며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주변 친구들이 '아이폰'을 쓰기 시작했다. 당시 전 국민 메신저는 '네이트온'이 유일했고 PC로만 채팅을 하다가, 휴대폰으로 실시간 채팅을 하지 못하면서 소외감이란 것을 알았다. 아마도 나는 그즈음부터 '디지털 러버'가 된 듯하다.
'시대의 지성'이라 불렸던 이어령(1933~2022) 선생님은 국문학자, 소설가, 문학평론가, 언론가 등 수많은 업적을 남기신 분이다. 1966년 이화여자대학교 강단에 선 후 30여 년간 교수로 재직하며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1990년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 취임하여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과 국립국어원 발족의 터를 닦고, 2021년 금관문화 훈장을 받을 정도로 대한민국의 언어, 문화와 예술 분야에서 빼놓을 수 없는 큰 별이다.
이어령 선생님은 살아 계실 때 남기신 저서가 160권이 넘으실 정도로 다작을 하셨는데, 책을 좋아했던 나는 이미 청소년기에 그분의 책들을 접했다. 그중 2006년에 읽었던 <디지로그>라는 책은 국문학을 전공하고 있던 내가, 단순히 인문학적 지식을 뛰어넘어 디지털 산업과 공학, 경영, 마케팅에도 관심을 갖게 해 준 중요한 책이다.
디지로그(Digilog)는 아날로그 사회에서 디지털로 이행하는 과도기, 혹은 디지털 기반과 아날로그 정서가 융합하는 시대의 흐름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한때 ‘혁명’으로까지 불리며 떠들썩하게 등장했던 디지털 기술은 그 부작용과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시 아날로그 감성을 불러들이고 있다. 이미 첨단 디지털 제품에 인간적인 감성과 정서를 담은 상품 마케팅으로 각광받고 있는 디지로그는 휴대폰이나 MP3 같은 유형의 최신 자본 시장에서부터, 정치, 사회 리더십이나 기업의 매니지먼트, 스포츠 전략과 같은 무형의 시장에 까지 감성마케팅의 새로운 유형으로 적용되고 있다.
-참고: Yes24 <디지로그> 책 소개
어릴 때 고장 난 기계를 아버지께로 가져가면, 신기하게 모두 다 고쳐주셨다. 공고를 나오신 아버지는, 철도 기관사로 오래 근무하셨는데, 기계에 대한 지식이나 관심이 많으셨다. 덕분에 또래보다 이른 나이에 펜티엄 컴퓨터를 접하게 됐고 아버지와 함께 팩 게임기로 슈퍼마리오를 함께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일까. 나 역시 휴대폰을 비롯해 mp3, PMP, 노트북과 같은 전자 제품을 보면 한눈팔기 일쑤였다. 이어 아이폰의 등장과 함께 애플사를 알게 되고 아이패드, 애플키보드, 아이팟, 맥북, 애플워치 등 소위 '애플빠'가 되었다. 애플을 좋아하는 이유는, 기능적인 편리함뿐 아니라 디자인까지 깔끔+심플한 데다 누가 사과 모양 제품을 갖고만 있어도 친구들 사이에서 뽀대 난다는 말을 하며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분위기도 한 몫했던 것 같다. 요즘 말로 하면, '폼 미쳤다' 정도.
서론이 길었지만, 결국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 제목처럼 '윈앰프에서 아이팟으로' 옮겨진 지금의 이 세대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이전의 아날로그 감수성을 기록해두고 싶었다. 메타버스니 NFT니, VR이니 AR이니 하는 것들이 세계를 디지털화해 버리면 내가 소중히 여겼던 것들이 다 사라질까 봐. 더 늦기 전에 글을 쓰고 싶었다.
2000년대, 감수성 충만하던 중학교 소녀 시절. 나는 좋아하는 노래들을 당대 최고의 P2P사이트였던 '소리바다'에서 다운로드하여 들었다. 컴퓨터에 깔아놓은 음악 재생 프로그램 '윈앰프'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해서, 한 곡 한 곡 넘어갈 때의 행복. 고가의 스피커가 없어도, 적은 용량의 파일 하나만 받아 두면 음악이 나에게 주는 전율과 감동을 무한 반복해서 들을 수 있었던 시절.
그런데 지금은 그 자리를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멜론'과 유튜버의 취향에 따라 기깔나는 띵작들로만 선곡해 주는 '플레이리스트'들이 대신하게 됐다. 아이팟이 모두의 귀에 꽂혀서 제 몫을 잘해주는 덕에, 더 이상 파일을 다운로드하고 mp3나 컴퓨터에 옮기는 수고를 하는 이들은 없어졌다. (USB에 좋아하는 음악파일을 1000곡 넘게 모아뒀었는데, 대학 컴퓨터실에 두고 와서 잃어버린... 뼈 아픈 기억도 난다) 이런 와중에도, 무선 이어폰이 아니라 줄 이어폰이 주는 아날로그적 감성이 좋다며 그것을 고수하는 나의 최애 가수 '크러쉬'도 있다.
세상은 변했고, 지금 이 순간도 변해가고 있다. 이제는 기업들도 모두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다. 챗GPT에게 질문을 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웬만한 친구보다 더 똑똑한데?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깜짝 놀랄만한 답변을, 꽤 진지하고 긴 문장을 조합해 내놓는다.
과연 어디까지 세상이 디지털화될지 지금의 나로선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건 디지털과 아날로그 둘 다 아우를 수 있는 '디지로그적 시대정신'이 필요하다는 거다. 아무리 기술이 최첨단을 달려도, 이전에 본 적 없는 서비스와 기계가 등장해도, 나는 사람의 두뇌가 가진 힘과 영혼의 감성은 지켜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 디지털 세계와 아날로그 세계의 중심을 잘 잡고 미래를 읽는 리더가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