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동생이 미국으로 떠났다. 한국도 아닌 미국에서 일을 하러.
엄마 아빠가 마흔 넘어서 태어난 늦둥이 막냇동생은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동생에 대한 어린 시절 기억이라고 하면 나는 한창 중학교 성적에 동동거리는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유치원에서 재롱잔치를 하고 있을 나이였다. 아들을 바라고 나으셨던 동생이 기대를(?) 저버리고 딸로 태어난 순간, 엄마는 너무도 실망하여 낳고 난 뒤 산부인과 원장님께 남 주라는 말을 했다는 후일담을 강력하게 심어줬다.
그렇지만 성별을 뛰어넘어 동생은 새로운 분위기를 우리 집안에 뿜어주었다. 학교 갔다 오면 방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 언니들과 다르게 유치원에서 배우고 온 것을 엄마 아빠에게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웃음소리가 들리게 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동생은 그 뒤에도 나의 기억 속에서 어쩐지 한 발 떨어진 채 바라보게 되는 동생이었다.
사춘기 질풍노도의 시간을 지나갔던 때, 엄마가 국립대학이 아니면 대학 뒷바라지는 못한다는 말에 고3에 정신을 차리고 공부하여 국립대학에 들어갔다는 것이 언니로서도 대단하게 보였다.
나의 인생의 속도 속에서 자세히 바라보지 않았을 때도 동생은 자신만의 삶을 펼쳐갔다. 식물 연구를 전공한 뒤에도 동생은 오로지 그 길로만 갔다.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것을 이렇게 재밌어하며 그것 말고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학부, 대학원에 이어 대학원 연구실에서 실험하고 논문 쓰면서도 자신의 길을 의심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갔다. 이제 그만 공부하고 엄마 아빠가 생각하는 돈 잘 버는 직장 생활을 하기를 내심 기대했지만 굳히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만의 길을 가다가 이따금 방전되었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내게 전화가 왔다. 뭘 많이 해주지 않았는데, 동생은 금방 울음을 그치고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다. 더 지칠 땐 우리 집에 놀러 와도 되냐고 물어보곤 했다. 하필 이 순간에? 연락이 오는 나의 상황이 여러 번 있었지만, 동생의 손을 잡아줘야 한다는 마음이 더 크게 들었다. 집에 오면 밥 해주고, 얘기 들어주는 것이 전부였지만, 돌아갈 적에는 마음을 다잡고 가는 모습이 다행스러웠다.
그런 동생에게는 한 가지 바람이 있었다. 외국에 나가서 공부하고 싶다는 것. 공부를 그렇게 오래 했으면 나 같으면 질려도 벌써 질렸을 텐데, 동생에겐 그것이 자신의 삶이자 전부였다. 몇 번의 넋두리를 들었는데, 해가 바뀌고 마음을 들려주었다.
"나는 그때가 늦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지금 보니까 차라리 그때가 빠른 때였어. 그러니 지금이라도 나가야겠어. 후회가 남지 않게."
말은 선택을 바꿔주었다. 외국 대학 연구실에서 일할 면접을 보았고 드디어 합격했다는 말을 전해줬다.
"와... 진짜 가네?!"
나는 동생을 통해서 그 모든 과정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주 그 모든 고민과 선택의 마침표를 찍고 날아갔다. 미국으로. 어떤 갈팡질팡도 없이 준비하고 떠나는 동생이 대단하게 보였다.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를 떠올리며. 그래서 사람은 자신만의 마음의 선택 속에서 스스로의 인생의 길을 만들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나는 동생보다 떠나는 모습을 보는 언니의 마음으로 마음이 괜스레 싱숭생숭해서 떠나기 전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했다. 동생이 좋아한다는 창덕궁. 동생이 좋아하는 밥집으로.
몇 년 뒤에 돌아온다는 이야기를 남기고 떠난 동생. 그전에도 잠시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지만, 마음이 허전하다. 한국에 있어도 늘 붙어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나라로 간 동생을 바라보며 나는 다시 한번 마음이 움찔했다. 동생이 한 말을 떠올리며, 동생과 추억을 곱씹으며,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