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의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2화 “하루 종일 창밖만 보던 은정 씨의 말 한마디

by 라이브러리 파파

나는 처음 그녀를 본 순간을 또렷이 기억한다.

가을이 깊어지던 날이었다.

창밖엔 바람이 스쳐가고, 병동 안에는 정적만 흘렀다.

새로 입소한 은정 씨는

창가 자리에서 하루 종일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작고 마른 어깨, 단정히 묶이지 못한 머리카락,

그리고 바닥을 향해 내려앉은 시선.


사회복지시설 (3).jpg

입소 기록지에는 짧은 문장 몇 개만 적혀 있었다.

“중증 우울. 자해 이력. 가족과의 단절. 어머니 사망 후 급격한 침묵.”

그 서류를 덮으며 나는 생각했다.

‘이 사람은 얼마나 오래 혼자였을까.’


나는 말을 아꼈다.

어설픈 위로나 접근은

오히려 벽을 더 단단히 만들 수 있다는 걸

이 일을 하며 오래전부터 배웠다.

그래서 그녀가 앉아 있는 창가에서

나는 아무 말도 없이 함께 앉았다.


첫날은 단 3분.

그다음 날은 5분.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며

그 시간이 조금씩 길어졌다.


내가 조용히 앉아 있을 때면,

그녀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가끔 아주 작게 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숨소리조차 이곳에서 살아 있다는

유일한 증거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바라보는 창밖에는

단풍이 떨어지고, 나뭇가지가 점점 헐벗어갔다.

그림처럼 반복되는 풍경이지만

그녀의 시선은, 마치 그곳에 무언가를 묻어둔 사람 같았다.


“은정 씨.”

나는 하루에 한 번, 조심스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멈추지도 않았다.


말을 하지 않아도, 대화는 있었다.

그녀가 등 돌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했다.


열 번째 날.

나는 늘 그렇듯 따뜻한 물 한 컵을 들고 그녀 곁에 앉았다.

무릎 담요를 덮어주려다 멈칫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내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그 순간,

그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저기… 나무, 이제 곧 다 떨어지겠네요.”


나는 그 말을 듣고,

마치 누군가 내 이름을 처음 불러준 것처럼

심장이 멈칫하는 걸 느꼈다.


그녀는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말은 분명 나에게 건넨 것이었다.

그 한 마디 안에는 계절의 흐름이 있었고,

그동안 쌓인 침묵이 있었고,

무너졌던 마음이 아주 조심스럽게

열리는 소리가 있었다.


“그럴 거예요. 그리고, 또 봄이 오겠지요.”

나는 아주 천천히 대답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내 쪽을 향해서,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은 맑지도, 선하지도 않았지만

그 안에는 살아 있으려는 의지가 있었다.


그날 밤, 나는 퇴근길에

요양원 입구 옆에 서 있던 감나무 아래에 섰다.

잎은 거의 떨어졌고, 가지에는 작고 단단한 감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나는 그 감을 바라보며

‘이 감처럼, 이 사람도 남을 수 있기를’

속으로 바랐다.


사람은 말 한마디로 무너질 수 있다.

하지만 말 한마디로 다시 피어나기도 한다.

그날 은정 씨의 말 한마디는

나에게 그런 확신을 주었다.


그 이후로, 그녀는 하루에 한 문장씩 말을 늘려갔다.

어떤 날은 창밖 구름을,

어떤 날은 병동 복도의 냄새를,

어떤 날은 내 커피 냄새를 이야기했다.


나는 그 모든 이야기를

기도하듯 조용히 들었다.


삶이란, 누군가에게는

아무 말 없이 함께 있어주는 시간이

모든 치료보다 먼저 필요하다는 걸

나는 이 일을 하며 배웠다.


지금도 가끔, 나는 창밖을 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녀가 바라보던 세상은

정말 많이 아팠을 것이다.

그 아픔 속에서도 다시 말을 꺼낸 사람.

나는 그 사람의 용기를 기억한다.


그녀의 그 한 마디는

지금도 내 하루를 시작하게 해 준다.


------------------------


※ 다음 회부터도, 지연의 시선으로 조용히 흐르는 일상의 기록이 이어집니다.

삶의 끝이 아니라, 다시 살아가려는 이들의 마음을 담아,

지연은 오늘도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소설을 씁니다》 15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