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의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3화 “당신이 거기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 편지 한 통

by 라이브러리 파파

“당신이 거기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 편지 한 통
지연의 시선으로

그날은 유난히 무거운 하루였다.


어쩐지 병동의 공기도 평소보다 더 눅눅하게 느껴졌고,
출근길부터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이상하리만치 거칠었다.
정신요양원이라는 공간은 원래 늘 조용하고 느리게 흐르지만,
그날따라 복도 끝 창문에 내려앉은 햇빛마저
쉽게 멀어지지 않는 피로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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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신입 환자 응대에 회의와 점검까지 겹쳐
커피 한 잔도 제대로 마시지 못한 채 하루가 빠르게 흘렀고,
점심시간 직후엔 식당에서 소리 없는 언쟁이 오갔고,
한 입도 삼키지 못한 식판을 앞에 둔 채
침묵만 이어가던 은정 씨의 눈빛도
나를 조금 더 오래 그 자리에 붙들어두었다.

모든 일이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온 건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었다.
나는 가방도 풀지 못한 채
책상 한 귀퉁이에 앉아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때, 누군가 조용히 다가와
내 책상 위에 작은 편지봉투를 내려놓았다.
하늘색, 약간은 오래되어 가장자리가 바랜 봉투.
앞면에는 정성스러운 필체로
‘지연 선생님께’라고 적혀 있었다.

순간, 가슴이 이상하게 먹먹해졌다.
누군가 내 이름을 또박또박 써준 그 글씨를 보는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의 피로가 잊히는 듯했다.
나는 손끝으로 그 봉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편지를 꺼냈다.
종이의 결이 따뜻했다.
누군가의 마음이 오래 머문 자리는
그 결마저도 달라 보였다.

“선생님,
이곳을 떠나며 꼭 한 번은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처음 여기 왔을 때,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았습니다.
세상도, 사람도, 저 자신도 다 멈춰 있었어요.”

나는 그 문장 하나하나를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읽어 내려갔다.
문장 끝마다
내가 기억하는 그 사람의 눈빛이 겹쳐졌다.
늘 침묵을 입고 있었던 말 없는 사람.
그러나 그 침묵이 결코 비어있지 않다는 걸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선생님이 제 이름을 불러줄 때마다
나는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그저 거기 앉아 계시던 그 시간이
제겐 정말 큰 힘이었어요.”

나는 손에 들린 종이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은 몰랐겠지만,
그 시간은 내게도 필요했던 시간이었고
내가 흔들릴 때마다
그 침묵의 자리를 지키며 배운 것도 많았다.

사람은 때때로 아무 말 없이도 서로에게 닿는다.
그건 어떤 기술도, 자격증도, 지식도
설명해 줄 수 없는 종류의 이해였다.

“제가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 건
선생님 덕분이에요.
당신이 거기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어요.”

그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는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책상 위에 팔을 올리고
얼굴을 묻은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눈물이 흘렀다.
소리 없는 눈물이었다.
누군가의 마음이 내게 닿은 순간,
나는 어쩌면 처음으로
내가 이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고맙게 느껴졌다.

퇴근길,
나는 일부러 평소보다 천천히 걸었다.
요양원 울타리 옆 감나무는
노랗게 물들어 있었고,
바람이 스치며 감잎 몇 장이
조용히 내 어깨 위로 떨어졌다.
나는 발끝에 닿은 잎 하나를 집어 들어
조용히 접어 편지 봉투에 넣었다.
그것은 마치 내 마음 한 조각을
그 사람에게 다시 돌려주는 것 같았다.

집에 돌아온 후에도

편지 내용을 몇 번이고 다시 떠올렸다.
어느 단어가 가장 나를 울렸는지 모르겠다.
‘이름’, ‘존재’, ‘힘’,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시간.

그 문장 속엔
우리가 이곳에서 얼마나
가치 있는 일들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따뜻한 증거가 있었다.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 주고,
그 사람이 말을 건넬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일.
그건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일이다.

나는 다음 날, 책상 서랍에 작은 상자를 하나 넣었다.
그 안에는 지금까지 받은 손편지와
작은 그림, 그리고 감사 인사들이 담겨 있었다.
그 상자를 여는 순간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말한다.
“지연아, 넌 괜찮아.
누군가에게 너는 그저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사람이야.”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누군가의 하루 곁에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함께 앉아 있다.

그 사람이 어떤 눈빛을 하고 있든,
어떤 상처를 품고 있든,
나는 그저 그 옆에 있으려 한다.

때로는 그저 '존재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살아갈 이유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이 편지 한 통으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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