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병동의 공기도 평소보다 더 눅눅하게 느껴졌고, 출근길부터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이상하리만치 거칠었다. 정신요양원이라는 공간은 원래 늘 조용하고 느리게 흐르지만, 그날따라 복도 끝 창문에 내려앉은 햇빛마저 쉽게 멀어지지 않는 피로처럼 느껴졌다.
아침부터 신입 환자 응대에 회의와 점검까지 겹쳐 커피 한 잔도 제대로 마시지 못한 채 하루가 빠르게 흘렀고, 점심시간 직후엔 식당에서 소리 없는 언쟁이 오갔고, 한 입도 삼키지 못한 식판을 앞에 둔 채 침묵만 이어가던 은정 씨의 눈빛도 나를 조금 더 오래 그 자리에 붙들어두었다.
모든 일이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온 건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었다. 나는 가방도 풀지 못한 채 책상 한 귀퉁이에 앉아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때, 누군가 조용히 다가와 내 책상 위에 작은 편지봉투를 내려놓았다. 하늘색, 약간은 오래되어 가장자리가 바랜 봉투. 앞면에는 정성스러운 필체로 ‘지연 선생님께’라고 적혀 있었다.
순간, 가슴이 이상하게 먹먹해졌다. 누군가 내 이름을 또박또박 써준 그 글씨를 보는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의 피로가 잊히는 듯했다. 나는 손끝으로 그 봉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편지를 꺼냈다. 종이의 결이 따뜻했다. 누군가의 마음이 오래 머문 자리는 그 결마저도 달라 보였다.
“선생님, 이곳을 떠나며 꼭 한 번은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처음 여기 왔을 때,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았습니다. 세상도, 사람도, 저 자신도 다 멈춰 있었어요.”
나는 그 문장 하나하나를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읽어 내려갔다. 문장 끝마다 내가 기억하는 그 사람의 눈빛이 겹쳐졌다. 늘 침묵을 입고 있었던 말 없는 사람. 그러나 그 침묵이 결코 비어있지 않다는 걸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선생님이 제 이름을 불러줄 때마다 나는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그저 거기 앉아 계시던 그 시간이 제겐 정말 큰 힘이었어요.”
나는 손에 들린 종이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은 몰랐겠지만, 그 시간은 내게도 필요했던 시간이었고 내가 흔들릴 때마다 그 침묵의 자리를 지키며 배운 것도 많았다.
사람은 때때로 아무 말 없이도 서로에게 닿는다. 그건 어떤 기술도, 자격증도, 지식도 설명해 줄 수 없는 종류의 이해였다.
“제가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 건 선생님 덕분이에요. 당신이 거기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어요.”
그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는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책상 위에 팔을 올리고 얼굴을 묻은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눈물이 흘렀다. 소리 없는 눈물이었다. 누군가의 마음이 내게 닿은 순간, 나는 어쩌면 처음으로 내가 이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고맙게 느껴졌다.
퇴근길, 나는 일부러 평소보다 천천히 걸었다. 요양원 울타리 옆 감나무는 노랗게 물들어 있었고, 바람이 스치며 감잎 몇 장이 조용히 내 어깨 위로 떨어졌다. 나는 발끝에 닿은 잎 하나를 집어 들어 조용히 접어 편지 봉투에 넣었다. 그것은 마치 내 마음 한 조각을 그 사람에게 다시 돌려주는 것 같았다.
집에 돌아온 후에도
편지 내용을 몇 번이고 다시 떠올렸다. 어느 단어가 가장 나를 울렸는지 모르겠다. ‘이름’, ‘존재’, ‘힘’,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시간.
그 문장 속엔 우리가 이곳에서 얼마나 가치 있는 일들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따뜻한 증거가 있었다.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 주고, 그 사람이 말을 건넬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일. 그건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일이다.
나는 다음 날, 책상 서랍에 작은 상자를 하나 넣었다. 그 안에는 지금까지 받은 손편지와 작은 그림, 그리고 감사 인사들이 담겨 있었다. 그 상자를 여는 순간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말한다. “지연아, 넌 괜찮아. 누군가에게 너는 그저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사람이야.”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누군가의 하루 곁에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함께 앉아 있다.
그 사람이 어떤 눈빛을 하고 있든, 어떤 상처를 품고 있든, 나는 그저 그 옆에 있으려 한다.
때로는 그저 '존재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살아갈 이유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이 편지 한 통으로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