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당신이 거기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 조용한 말 한마디의 힘
그날도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아침이었다.
나는 병동 순회를 마치고, 305호 병실로 향했다.
거기엔 은주 씨가 있었다.
입소한 지 다섯 달,
그녀는 단 한 번도 먼저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표정은 무표정에 가까웠고,
시선은 늘 창밖 어딘가를 떠돌았다.
나는 그런 그녀 곁에 조용히 앉았다.
어떤 날은 책을 읽는 척했고,
어떤 날은 그냥 창밖을 함께 바라보았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시간이 헛되다고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창밖에는 벚나무가 있었다.
계절은 막 봄으로 넘어가는 길목이었다.
하얀빛이 번지듯 피어오르던 벚꽃이
아직은 어설픈 모습으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꽃잎 몇 장이 유리창에 부딪혔다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가끔 사람들의 마음도
저렇게 작고 가볍게 부서지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은주 씨의 손등을 흘끗 바라봤다.
작고 마른 손,
어디에도 기대지 못하는 손이었다.
그 손이 가끔 무릎 위에서 떨릴 때면,
나는 말없이 내 손을 모았다.
괜히 불필요한 온기를 강요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느 봄날 오후였다.
햇살이 병동 창을 통과해 바닥에 길게 드리워진 시간.
나른한 공기, 조용한 기침 소리,
그리고 느리게 걸어가는 간호사의 발소리.
모든 것이 흐릿하고 부드럽게 녹아내리던 그 시간.
나는 평소처럼 은주 씨 곁에 앉아 있었다.
별다른 기대 없이,
그저 하루의 조각을 함께 견디는 마음으로.
그런데 그날,
은주 씨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짙은 그림자 같은 눈빛.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고 흔들리던 시선이
처음으로 나를 정확히 향했다.
그녀의 눈빛은 말하고 있었다.
지치고, 무너지고, 그러나 어쩌지 못하는 마음이
그 짧은 순간 다 읽혔다.
나는 온몸이 긴장된 채, 숨을 죽이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입술이 아주 작게 움직였다.
그리고 입술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선생님이… 여기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 한마디가 공기처럼 내 가슴에 스며들었다.
나는 놀라서, 순간 숨조차 멎을 뻔했다.
조금의 떨림도, 과장도 없는 그 말.
조용하지만 확실히 닿은 그 한마디.
나는 어쩔 줄 몰라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나올까 봐, 함부로 대답하지 못했다.
입술을 깨물고 겨우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창밖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 그림자가
바닥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모든 풍경이
그녀의 한마디를 배경 삼아 조용히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은주 씨는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우리는 아무 일 없던 사람들처럼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는 알았다.
그날 이후, 우리 사이에 무언가가 달라졌다는 걸.
보이지 않는 얇은 벽이
조용히 무너졌다는 걸.
나는 마음속으로 작은 다짐을 했다.
이 순간을 잊지 말자고.
다정함은 말이 아니라,
함께 존재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창밖에서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벚꽃 잎 하나가 유리창에 스쳤다.
그 하얀 조각이 흘러가듯,
내 마음속 무거웠던 의심과 두려움도
조금씩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나는 생각했다.
돌봄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말없이 함께 있어주는 것.
존재 자체로 곁을 지켜주는 것.
그것이 누군가에겐
살아갈 이유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나는 그날 이후,
병동 순회를 할 때마다
'내가 오늘은 누구의 곁을 지키고 있을까'를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아무런 반응도 없는 환자의 침대 옆에
한참을 앉아 있다가 돌아서기도 했다.
어떤 날은,
창가에 혼자 앉아 있는 이에게
커피 한 잔을 조심스럽게 건넸다.
그리고 어떤 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옆에만 앉아 있었다.
말을 건네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없이 머무는 것도 얼마나 소중한지,
그녀가 내게 가르쳐준 것이다.
지금도 가끔,
병동 복도를 걷다가 창가에 앉은 사람을 보면
조용히 발걸음을 멈춘다.
굳이 말을 건네지 않고,
같은 하늘을 바라본다.
그 짧은 머뭇거림이
어쩌면 그 사람에게
'다행'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나는 믿게 되었다.
밤이 내려앉은 병동 창가에 서서
어디론가 사라지는 별빛을 볼 때면,
나는 가끔 은주 씨를 떠올린다.
조용하지만 단단했던 그 말 한마디.
"선생님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 문장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내 안에서 작은 등불처럼 타오른다.
어떤 날은,
지치고 무너지는 마음을
조용히 붙들어준다.
어떤 날은,
한 사람을 위해 또 하루를 버텨야 한다고
작게 속삭여준다.
그리고 나는 다짐한다.
오늘도,
누군가의 '다행'이 되기 위해.
말없이, 그러나 분명히.
한 사람의 하루 옆에,
내 하루를 조용히 세우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