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피로] 부부라는 이름으로 너무 오래 버텼다
오늘은 “피로”라는 감정에서 시작합니다.
부부싸움의 본질은 때로 '사랑의 부재'가 아니라 '피로의 축적'이라는 걸,
저는 아주 늦게 깨달았습니다.
결혼 13년 차, 우리는 이제 30대 중반의 부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좀 익숙해졌겠지.”
그런 기대와 달리,
익숙해진 건 사랑이 아니라 침묵이었고,
편안해진 건 공감이 아니라 거리감이었습니다.
아이 둘을 키우고,
매일 출근하고,
밥하고, 정리하고,
해야 할 일만 남은 하루 속에서
부부라는 이름은 점점 책임처럼 느껴졌습니다.
서로를 ‘지켜주는 사람’이 아니라
‘기대할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졌습니다.
아침엔 늘 정신이 없습니다.
아이가 일어나는 시간, 등교 준비,
간단한 아침을 챙기며 출근을 준비합니다.
대화는 점점 줄고,
“물 좀 줘”, “이따 봐”, “오늘 몇 시에 와?”
이런 기능적인 말만 남았습니다.
퇴근 후엔 한숨부터 나옵니다.
아이의 문제집 확인, 저녁 준비, 빨래, 설거지,
하루가 끝난 듯해도 내 마음은 여전히 바쁩니다.
그리고 그런 날엔
어김없이 짜증이 먼저 말을 시작합니다.
“왜 이건 안 돼 있어?”
“이 정도는 알아서 해주면 안 돼?”
그리고
“너는 왜 항상 그래?”
그 말들이 전부 ‘너무 지쳤다’는 말이었음을
우리는 왜 몰랐을까요.
아니,
알면서도 왜 말하지 않았을까요.
나는 아내에게,
아내는 나에게
“나 지금 힘들어.”
그 말을 왜 하지 못했을까요.
아마도 서로가
“말 안 해도 알아주겠지.”
“이 정도는 참아야지.”
그렇게 애써 ‘어른’처럼 굴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피로는 쌓입니다.
감정은 무게를 갖고,
사랑은 그 무게 아래 눌려 사라집니다.
우리는 자주 싸우지 않았지만,
말을 아꼈고,
표정을 숨겼습니다.
가장 무서운 건
싸움이 아니라
서로에게 무관심해지는 마음이었습니다.
“부부라는 이름으로 너무 오래 버텼다.”
이 말이 떠오르는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버티는 데 익숙했지,
표현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괜찮아?”라는 말보다
“이 정도는 그냥 넘기자.”
그렇게 피로를 방치했습니다.
부부라는 이름은
함께 버티는 사이가 아니라
함께 살아내는 사이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버티기’만 해왔습니다.
아이는 점점 자랍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점점 감정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아이가 말했습니다.
“엄마 아빠 오늘은 안 싸워서 좋았어.”
그 말에
나는 웃는 대신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평범한 하루’가
아이에겐 ‘기억에 남을 만큼 특별한 날’이라는 사실.
그게 얼마나 아프고, 또 미안한 일인지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언제부터인가 ‘침묵’이라는 방식으로 변해버렸습니다.
하지만 그건 위함이 아니라
회피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말해야 합니다.
“나 오늘 좀 힘들었어.”
“당신도 많이 피곤하지?”
그 한마디가
사랑을 다시 시작하게 합니다.
30대 중반의 우리는
이제야 배워가고 있습니다.
피로를 감추지 않고 말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어른의 대화라는 걸.
우리는 부모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남자와 여자입니다.
서로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안전한 사람이 되어야
아이에게도 따뜻한 울타리가 될 수 있습니다.
언젠가 내가 울고 있을 때
아이가 조용히 내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괜찮아, 아빠. 그냥 울어도 돼.”
그 말이
지금도 가슴을 울립니다.
그날 이후, 저는 다짐했습니다.
내 아이 앞에서 울 수 있는 아빠가 되자.
감정을 참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을 인정하고 나누는 사람이 되자고.
당신도 피곤하죠?
지금 이 글을 읽는 그 시간에도
당신 마음 어딘가엔
“그만하고 싶다”는 말이 맴돌지도 모르겠습니다.
괜찮아요.
그 마음, 당신만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가정을 지키는 척’하면서
혼자 버티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 글이 작은 쉼표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하루,
서로에게 물어보세요.
“나 너무 지쳤는데… 오늘은 그냥 안아주면 안 될까?”
말은 짧지만
그 안에는 모든 감정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피로는 조금씩, 천천히
우리 곁을 떠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다음 편 예고
2편. [무기력]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 아무 말도 듣기 싫었다
싸움도, 대화도 하기 싫었던 어느 날.
말을 건네는 게 두려웠고,
말을 듣는 것도 무서웠습니다.
그날 나는
하루 종일 침대 위에만 누워 있었습니다.
아이의 목소리도, 배우자의 숨소리도
어쩐지 멀게 느껴졌던 날.
다음 편에서는
감정의 바닥에 앉아 있던 그날을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사랑은 멀어지지 않았지만, 나의 의지가 멀어졌던 시간.
그 무기력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