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OLUTION ZERO – 우리가 흩어진 날》

EP.02 – 제로 존의 입구

by 라이브러리 파파

[로미, 플랫폼의 빛]

2035년 6월 8일 오전 4시 15분.
황성 남부 열차 정거장 라인 7C.
그곳은 더 이상 열차가 멈추지 않는 플랫폼이었다.


녹슨 철제 기둥들은 비틀리고, 전광판은

꺼진 채 숫자조차 표시하지 않았다. 천장 스피커는

간헐적으로 지직이는 소음을 내며 고장 난

심장처럼 멈춰 있었고, 벽면의 광고

패널은 바람에 찢긴 채 너덜거리다

결국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철로 사이로 바람이 흐르며 석탄 냄새와

오래된 피 냄새가 뒤섞여 퍼졌다.


그러나 플랫폼 바닥, 금이 간 철판 위에

작고 희미한 빛이 하나 떠올랐다.


Leonardo_Phoenix_10_A_young_girl_with_glowing_hands_kneeling_b_1.jpg

한 아이의 손목, 작고 하얀 팔에서 깜빡이는 빛.
로미의 레볼칩이었다.

그녀는 열차 객실 내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앙상한 어깨를 웅크리고, 조심스럽게 숨을 쉬며,

이따금씩 손끝으로 무릎 위를 문질렀다.

바닥은 찬기와 금속 먼지로 가득했지만,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 손… 따뜻함… 기억해.”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입술을 움직이며 손을 펼쳤다.
작고 마른 손바닥엔 온기가 서려 있었다.
그녀가 손을 얹은 곳엔,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또래 여자아이가 누워 있었다.


[감응 유지 시간 초과 임박 – 시스템 오류 가능성 있음]

스마트 렌즈에 떠오른 시스템 경고는 무자비하고 차가웠다.

하지만 로미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경고창을 닫지도 않았다.
그저 손을 조금 더 깊게 눌렀다.
이마 위의 열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아이의 숨소리가

조금씩 안정되었다.


로미는 그 작은 변화를 온몸으로 감지했다.
그리고 속삭였다.

“괜찮아… 곧 누군가 올 거야.”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로미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열차 객실은 여전히 어두웠다.
낡은 형광등 하나가 깜빡이며 간헐적으로 켜졌다 꺼졌다.
손전등도 없고, 보급물도 없고, 의약품은 당연히 없었다.

하지만 이 공간에는
아이들이 있었다.

하나, 둘, 셋…
로미는 본능적으로 아이들의 얼굴을 세며

머릿속으로 위치를 파악했다.
누구는 아직 숨을 고르고 있었고,

누구는 깨어나지 못한 채 기절한 상태였다.
그녀는 앉아 있는 아이 옆으로 기어가,

부드럽게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이는 깜짝 놀라듯 눈을 떴지만,

로미의 눈동자를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물… 좀만… 있었으면…”


로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말은 곧, 물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가방을 열었다.
털실가방.
유치원 때 엄마가 만들어 준,

코랄색 실이 물 빠진 것처럼 바랜 작은 가방.
그 안에 마지막으로 남은 건:

물티슈 한 장

부스러진 비타민 사탕 두 개

그리고 오래전에 잊혔던 작은 종이접기 도면


그 종이는 접힌 부분이 이미 다 닳아 있었고,

색도 바랬지만, 그녀는 그걸 조심스럽게 꺼내 보았다.
종이 뒷면에는 엄마가 그려 준 도면이 있었다.
'응급 감응 주파수 수동 송신기'—로미는 그걸 떠올렸다.


“이걸로 누군가를… 부를 수 있을 거야.”

아이의 손을 잡고, 로미는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바라봤다.
먼지와 어둠, 그리고 붉게 피어오른 연기.


그러나 그 어둠 속에도

희미한 선로의 윤곽은 존재했다.

“제로 존… 거기까지 가야 해.”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일어섰다.
몸이 흔들렸고, 무릎이 부딪히자 고통이 번졌지만,
그녀는 다시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이제… 나가야 해.”

그 말에 단 한 아이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은 어제까지만 해도 인형을 들던 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을 살리는 손이었다.
작지만 단단한 손.
따뜻한 손.


[다비드, 사령부를 떠나다]

그 시각, 황성 외곽 지하 방공 터널.
다비드는 방독 마스크 위로 날숨을 길게 뱉었다.
터널의 공기는 땅 속 깊이 갇힌 먼지와

기름 냄새로 가득했다.
머리 위 콘크리트는 몇 차례 붕괴 흔적이 있었고,

지하 구조물은 삐걱이며 저항하듯 흔들렸다.


손목의 레볼칩은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지휘 이탈 감지 – 레벨 2 → 조건부 보류]


그는 그 문구를 외면했다.
손끝이 닿은 쇠문 위엔 숫자 하나만이 붉게 빛났다.


Leonardo_Phoenix_10_a_breathtakingly_detailed_highcontrast_ill_0 (1).jpg 제로 존 ZERO ZONE


‘0’ — ZERO ZONE.

“제로 존…”
그는 중얼이며 고개를 들었다.
이곳은 시스템 상 ‘비인가 구역’으로,

프리덤도, 권한도, 명령도 통하지 않는 배제된 구역이었다.

그의 눈에는 수없이

많은 지도 데이터, 구조 명령, 교전 기록들이 떠올랐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에 있는 건 단 하나.

로미의 마지막 신호가 남겨진 위치—남부 폐열차 정차 구역.


Leonardo_Phoenix_10_Collapsed_Train_Car_in_Toxic_MistPromptA_p_1 (1).jpg

“나는 이탈자야.
하지만 그 아이들의 아빠이기도 해.”


그는 가슴에 달린 군번줄을 만졌다.
그 속엔 로미와 라운의 사진,

그리고 아내 제인의 손글씨로 적힌 쪽지가 들어 있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을 먼저 기억해 주세요.

당신이니까, 할 수 있어요.」

심장은 아팠다.

하지만 그 아픔은 방향이 되었다.

그는 계급장을 떼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손에 남은 건

충전된 구급 드론 하나

손수 개조한 휴대형 신호 송신기 하나

그리고, 딸의 이름

Leonardo_Phoenix_10_A_mesmerizing_hyperrealistic_illustration_1.jpg 아빠 다비드


그는 더 이상 시스템이 부여한 장교가 아니었다.
이제 그는,
‘아빠 다비드’였다.

천천히 쇠문을 밀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 얼굴을 스치는 바람은 냉기와 함께,

희미한 피 냄새와 탄 냄새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시스템도,

어떤 수치도 이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는 중얼였다.

“레벨은 잊어. 이제는 이름으로 간다.”

그의 발걸음이 제로 존으로 향했다.


[제인, 백도어를 건너는 설계자]

2035년 6월 8일, 오전 4시 38분.
황성 남부 폐연구소 지하, 전력이 끊긴 제2 서버실 내부.

제인은 철제문을 닫은 채, 고개를 숙이고 숨을 가다듬었다.
숨결 속엔 오래된 전자 기기의

먼지 냄새와 연기의 잔향이 섞여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낡은 납땜기를 움켜쥔 채 떨리고 있었다.



Leonardo_Phoenix_10_a_highly_detailed_digitally_painted_illust_1.jpg 제인, 백도어를 건너는 설계자

전선 피복이 녹아내린 자리에 새 회로를 잇기 위해,

그녀는 직접 손가락을 대고 전류 흐름을 추적했다.
피부가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레볼루션 설계자 제인 박사’가 아니었다.

“지금은 기술자가 아니야. 지금은… 로미의 엄마야.”


책상 위, 녹슨 드론의 코어 옆에는

종이학 하나가 조심스레 놓여 있었다.
무지개 색감이 바랜 그 종이학은,

로미가 여섯 살이던 해 접어준 것이었다.
“엄마가 슬플 때 이거 보면 돼.”
그때의 목소리가 지금 이 고요 속에서 되살아났다.

서버는 전원이 완전히 끊긴 지 오래였지만,

그녀는 예비 저장소에서 감응 기록 로그를

하나씩 복호화해 나가고 있었다.

제인의 눈에 박힌 건, 파형 중 유독 미세한 진동을 띠는 주파수 하나.

[신호 추정: 감응 계열 / 유사 사용자: 로미 / 위치: 황성 남부 열차 폐선 구간]

그녀는 화면을 본 순간,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이 터질 것 같았지만, 울지 않았다.
엄마는, 울기 전에 먼저 ‘확인’부터 해야 하니까.

제인은 즉시 백도어 경로를 불러왔다.
한때 레볼루션 시스템 보안설계의 뒷문으로 불리던

이 경로는, 비상 재난용이었지만 내부에선 ‘오류’로 분류되어 폐기된 것이었다.



Leonardo_Phoenix_10_Glitch_Interface_Zero_Zone_DetectedPrompt_1 (1).jpg

“이건 해킹이 아니야.
이건 복원이고,
이건… 엄마로서의 작동이야.”


손목의 레볼칩이 반응하며 미세한 열기를 전했다.
시스템은 여전히 그녀를 ‘레벨 1: 감응 분석자’로

인식하고 있었고, 프리덤 10을 지급했다.
하지만 그 숫자 따위, 지금 그녀에겐 아무 의미 없었다.


로미의 손을 다시 잡고,
라운의 계정을 복원하기 전까지,
그 어떤 보상도 위로가 될 수 없었다.


그녀는 땀과 먼지가 뒤섞인 얼굴을 닦지도 않고,

손수 조립한 휴대형 송전 모듈을 등에 멨다.
그 안엔 직접 수리한 드론 센서, 조난 수신기,

구형 AI 해석 모듈, 그리고 종이학이 함께 들어 있었다.


제인이 지하 통로를 벗어나는 순간


좁은 배관 통로를 기어가는 동안,

Leonardo_Phoenix_10_Female_engineer_crawling_through_a_broken_0.jpg

그녀의 무릎은 날카로운 철편에 찢겼고, 손등엔 다시 화상 흔적이 남았다.
하지만 그녀는 신음하지 않았다.
그녀의 신호 수신기는 황성 남부 폐선 구간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고,
심장은 점점 빨리 뛰기 시작했다.

마침내, 철제 맨홀을 밀어 올리고 지상으로 나왔을 때
푸른 안갯속에 불꽃이 희미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제인은 고개를 들고, 그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다려.
로미야, 엄마가 가고 있어.”


[라운, 무너진 복도에서 태어난 리더]

2035년 6월 8일 오전 4시 52분, 황성 중부 폐허 구역.

무너진 학교 건물의 복도 틈새.
빛은 없고, 소리는 없고, 살아 있다는 증거는

오직 심장의 박동뿐이었다.

라운은 숨을 멈췄다.

Leonardo_Phoenix_10_A_breathtakingly_detailed_highcontrast_ill_1 (3).jpg

철근 더미 너머, 붉은 드론의 센서가

복도 바닥을 훑고 지나가고 있었다.
센서는 멈췄다가, 다시 움직이고, 그리고 이내 사라졌다.

그제야 그는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었다.

“석현아… 미안해. 이번엔… 내가 앞에 설게.”

그 말은 공기 속으로 흩어졌지만, 스스로에게 내리는 다짐이었다.
어제, 석현이 자신을 밀쳐내고 대신 드론에 노출된 그 순간이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대로 떠올랐다.

그는 손등의 상처를 조심스럽게 누르며 일어섰다.

녹슨 쇠파이프가 손에 쥐어졌다.
체육창고에서 주워온 무기 아닌 무기.
그 끝엔 이미 마른 피가 어둡게 얼룩져 있었다.


그는 드론의 잔해를 해체하다 손가락이 찢겼고,
중고 스마트폰에 배터리를 연결하기 위해

전선 피복을 벗기다 감전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중단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손에선, 이제 누군가의 생명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그를 따르고 있었다.


무너진 교실에서 함께 버텨낸 아이들.
식량도, 물도, 의료 드론도 없는 이 폐허 속에서
그는 가장 먼저 일어난 사람이었고,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이었고,
가장 먼저 드론을 쓰러뜨린 아이였다.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

“형, 이제 어떻게 해?”

라운은 그 질문에 망설이지 않았다.

“이 자리를 떠야 해. 내가 앞장설게.”

그 말은 그저 방향이 아니라, 책임이었다.
자신이 아니면 이 아이들 중 누구도 나아가지 못할 거라는
무거운 확신이 담긴 말이었다.

그는 구급 도구가 없는 상황에서

가방에서 찢은 수건으로 부상자의 다리를 감쌌다.
피가 멎지 않자, 손으로 눌렀다.
아빠가 남긴 응급처치 영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붕대는 단단히, 그리고 멈추지 말고.”

그는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했다.

그 순간, 손목의 레볼칩이 진동하며 반응했다.

[전투 감지 / 레벨 1 등록 승인 / 비공식 보상 – 프리덤 5 지급]

그러나 그 수치는 그에게 의미가 없었다.

Leonardo_Phoenix_10_A_highdetail_futuristic_coin_called_Freedo_3.jpg 반응하는 손목의 레볼칩

5 프리덤으로는 생수 한 병도 못 샀지만,
아이들 앞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기엔 충분했다.

조용히 움직이며 그는 통로 끝에 도달했다.
그곳엔 무너진 창틀과 철망이 얽힌 출구가 있었고,
그 너머로는 황성의 폐허가

새벽빛 아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따라와. 절대 떨어지지 마.”

그 말에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한 아이는 걸을 힘이 없어 라운의 등에 업혔다.


그는 아이의 체중이 실린 채, 다시 걸음을 옮겼다.
통로 아래, 오물과 부식된 물이 고인

다리 밑으로 들어가야 했다.

냄새는 숨을 막았고, 발밑은 미끄러웠고,
기둥 사이로 드론의 불빛이 멀지 않은 곳에서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는 방향을 잃지 않았다.

그가 들고 있는 건, 단순한 파이프가 아니었다.
그건 방향이었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방향은, 도망이 아니라 연결이었다.

“도망치지 말고, 연결을 찾아.”
엄마가 쪽지에 남긴 그 말은
지금 그의 발걸음 하나하나에 담겨 있었다.

다리가 끝나는 지점,
그는 오래된 배전함을 발견했고,
연결 단자를 손으로 바꾸어 구조 신호를 보냈다.

'나 여기 있어요. 아이들도 있어요. 우리는 살아 있어요.'

신호가 발신되자 그의 손이 떨렸다.
하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아빠가 말했었다.

“눈물은 쉬어도 돼.
하지만 발걸음은 멈추면 안 돼.”


Leonardo_Phoenix_10_A_middle_school_boy_with_a_determined_expr_1 (1).jpg 쇠파이프를 손에 든 라운

그는 다시 걸었다.

아이들을 이끌며,
쇠파이프를 손에 든 채,
시스템에 감지되지 않는 가장 강한 리더로서.


EP.03 – 차단구역의 새벽, 깨어나는 연결 (예고편)

2035년 6월 9일 새벽 4시 48분.
황성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차단구역’은 한때 통신 중계소였던 버려진 구조물 군락이었다.
무너진 안테나, 침식된 통신탑, 바닥에 쓰러진 드론 수신패널.
이곳은 시스템의 망각 속에 묻힌, “연결이 사라진 구역”으로 불렸다.


Leonardo_Phoenix_10_Postapocalyptic_city_at_dawn_2035_A_desola_1.jpg

하지만 그 새벽,
끊긴 회선에 미세한 신호가 깃든다.
로미의 손에서 전송된 희미한 감응 주파수.
라운이 배전함에서 복구한 재난 알림 코드.
제인이 백도어를 통해 돌파한 네트워크의 맨 끝.
그리고 다비드가 품고 있던,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의 신호.


“이 신호… 서로 닿고 있어요.”

사라졌던 연결이, 차단되었던 마음이,
폐허 위에서 다시 깨어나고 있다.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제로 존에 도달한 가족의 운명적 엇갈림

감응 신호의 충돌과 통합, 시스템 오류 발생

차단구역에서 생존 중인 또 다른 존재의 등장

그리고… 레벨을 거부한 자들만이 알게 되는 새로운 진실


시스템은 여전히 숫자로 인간을 나누려 한다.
그러나 서로를 부르는 이름은, 차단되지 않는다.

《Revolution Zero – EP.03》
곧, 깨어나는 연결 속으로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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