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en, 대학에 오다. 그때를 생각하다.
언니가 떠오른다. 어제 지니 언니와 연극업계에 관한 이야기를 한창 나누었다. '선배 언니의 자살, 성상납, 철저한 위계질서. 백수보다도 못할 법한'같은 힘든 키워드들이 테이블을 오갔다. 3.3% 세금을 내는 법조차 모르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많다고 한다. 회당 2만 원을 받으며 일하면서도 감사하게 여길 만큼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는 적다. 무대에 오른다 해서 성공하거나, 그 길이 오래 보장되지도 않는다. 인격 모독을 당하면서 연극, 연기일을 지속하는 원동력이 바닥날 때, 사람들은 지쳐 다른 일을 찾게 되고, 자신을 꿈을 포기한 것에 대해 후회 없다 말한다.
나는 그게 이해가 되었다. 꿈을 쫓아갔을 때 올 수 있는 그 허망함. 앞만 보고 달렸는데 그 끝이 낭떠러지 벼랑 끝인 그 기분. 꿈만 쫓아가기엔 나를 옥죄는 것들이 현실엔 너무 많다. 내가 지금 피곤에 쩌들어 있으면서도 잠을 자지 못하는 것도 이런 '불편한 무언가'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했다. 미래, 돈, 연애, 결혼, 가족, 더위, 내일의 여행, 자소서, 취직, 취미생활까지.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
20살. 그를 만나면서 감사하게도 많이 생각해본 시절이다.
나는 20살에 무엇을 했었지.
나는 20살에 어떤 생각을 했었지.
미래와 직업애 대한 치열한 고민이 있었다. 그 고민이 끝날 무렵(포기한 것이 더 알맞은 표현일지라도), 나는 내 답답함을 갈갈이 헤쳐줄 무언가, 나를 숨 막히게 하는 이 작은 수족관으로부터 뛰쳐나갈 문을 미친 듯이 찾고 있었다. 국토대장정. 내일로. 여행향기. 슘니. 이것들이 내 20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문예단과 섹티경연대회. 내 학교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어준 감사한 친구들도 20살 때 만났다.
누군가, 학창 시절의 친구와 대학 때 친구는 굉장히 다르다고 말했다. 속을 털어놓기도 힘들고 순수했던 시절에 만났기에 순수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고. 하지만 나는 (적어도 내 생각에) 꽤나 순수했다. 예쁜 케이크 한 조각에 감탄하고, 맛있는 라면 한 그릇에 행복할 줄 아는 그런 순수함을 지니고 있었다.
사람은 끊임 없이 생각하고 고뇌한다. 나 역시 지금 현재를 살고 있기에 현재의 고민이 가장 묵직해 보이지만 실제로 난 항상 묵직한 고민을 안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다툴 때도, 유학을 갈 때도, 시드니 아줌마 아저씨가 격렬하게 싸울 때도 난 마음을 졸이며 끊임없이 고민했다.
20살. 아빠는 나에게 '넌 너무 고민을 많이 해'라고 이야기했었다.
24살. 목련 언니는 '넌 너무 빨라'라고 이야기했다.
정신적 성숙도. 성숙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점점 성숙해가는 것이라기보다, 그냥... 자연의 섭리가 그렇듯 시간이 지나면서 더 많은 고뇌의 돌이 쌓이고 더 많은 풍파를 겪으며 그것들이 둥글려지고 내 스스로 조절 가능한 능력치들이 생기는 것이다. 나는 항상 고민이 있었다. 단순하다고 생각했지만 절대 단순할 수 없는 내 머리 구조는 날 지금의 YJee로, 조금은 늙어 보이고 조금은 성숙해 보이는, 그런 사람으로 만들었다.
나는, 20살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다시 그 힘든 고민과 나이 듦의 과정을 지나 지금의 YJee가 되는 것이 너무 힘겨워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24살 지금, 어쩌면 내 인생의 3분의 1을 살았을 이 시점에 나는 아무 생각 없던(내가 여태 고민이 있었다 말했지만, 그때는 난 그 고민을 잊고 해결할 파워가 있기도 했던 것 같다) 20살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 시절, 만날 슘과 뭘 먹으러 갈까 고민하고, 문예단이 함께 모여 춤추며 히히덕거리던 그 시절로.
#Wien, 대학 안 카페에서. 끄적거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