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들어가는 삶, 남이 만들어 준 삶
'삶을 선택하십시오'
며칠 전 나의 눈을 확 사로잡은 글귀다. 내 삶은 내가 선택해서 살아가라는 그 말, 그게 작년부터 내 삶의 가장 큰 토픽이었던 것 같다. 이왕 살 거 재밌게 살고 싶었고, 그러려면 내 속을 잘 들여다봐야 했다. 나도 모르는 나의 모습을 하루하루 발견하면서 큰 쾌감이 들기도 했고 실망하기도 했고 상처 받기도 했지만 결국 내 삶이라니 받아들이는 여유가 생긴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내가 공부를 가르치는 두 아이를 보고 선택하여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교육에 중요한지 느꼈다. 한 집의 아이는 삼 자매의 둘째로 스스로 선택하는 삶을 주로 살아왔다. 부모님이 모두 일을 하셔서 운동화 빨래나 간단한 저녁 차림은 스스로 다 한다. 다른 집의 아이는 무남독녀 외동딸로 부모에 의해 돌봄 받으며 선택된 삶을 살아온 것처럼 보인다. 아이가 생기면서 엄마는 일을 그만두셨고 아이에게 공부할 것, 읽을 책, 먹을 음식까지도 골라주셨던 것 같다.
두 아이는 주어진 것을 대하는 태도가 꽤나 많이 차이 난다. 두 번째 아이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들을 우선 의심하고 거절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엄마가 주는 것, 선생님이 주는 것은 재미없고 지겨운 것으로 첫 번에 생각해버리니 가리키는 입장에서 당황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이 아이에게 '영어'란 재미없고 지루한 무언가 이다. 자신은 그림을 그리고 친구들과 노는 것을 하고 싶지만, 어릴 때부터 학원과 과외로 배운 영어는 지겹기만 할 뿐이다.
반면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자라진 않았지만, 스스로 선택하며 살았던 그 친구는 자기가 하는 많은 것들이 즐겁고 감사하다. 한 번도 과외를 해본 적이 없어 영어 수업을 오매불망 기다렸다고 한다. 원해서 시작했으니 배우는 것이 하루하루 더 재밌단다. 아직 초등학생인 이 아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진 아무도 모르지만, 그냥 오늘 두 아이를 보면서, 내 마음에 걸렸던 '삶을 선택하시오'라은 문구가 얽혀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했다.
나이가 들면서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일이 많아졌다. 엄마, 아빠에게 탓을 돌릴 수 없는 나만의 결정들이 늘어가면서 항상 어떤 기준으로 결정을 해야 할까에 대한 고민이 생긴다. 나의 엄마, 아빠는 어릴 때부터 나에게 많은 선택권을 넘겨주셨었다. 고집이 세고 하고 싶은 게 많았던 나는, 항상 거침없이 엄마에게 원하는 것을 이야기했었다. 그중 내 인생에 큰 영향력을 미쳤던 것이 서울로 이사 온 것과 호주 유학이었다. 더 넓은 세상에 가보고 싶었던 12살의 나는 엄마에게 서울로 이사를 가고 싶다고 했다. 엄마는 큰엄마네 집에 나를 맡겨주었고,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 해외에 가고 싶었던 나는 또 유학을 가고 싶다고 했다. 엄마는 내 선택을 존중해주었다. 이리저리 비용을 모아 호주를 보내주었고 혼자 유학하며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엄마 아빠는 항상 말했었다. 네가 재밌게 살 수 있는 선택을 하라고. 내가 무슨 일이 생기면 치열하게 고민하면서도 결국 내 마음에 끌리는, 내 인생을 좀 더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부모님의 조기교육 덕분이었다. 대기업을 포기할 때도, 모았던 돈을 탈탈 털어 여행을 갈 때도, 스타트업을 할 때도 부모님은 '그게 재밌니? 네가 즐겁게 할 수 있니?'라고 물어봐주셨다. 돈의 유혹, 주변 사람들의 유혹에 많이 흔들렸지만 결국 내가 나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였다.
나이가 들면서 철학의 필요성을 많이 느낀다. 내 삶의 기둥이 되는 가치관을 세우고, 그 가치관이 흔들리지 않게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것 말이다. 매 순간순간의 선택들이 눈 앞에 주어졌을 때, 내 생각보다 주변의 흐름에 따라가게 되는 경우가 많이 생긴다. 나는 고집이 있고, 나의 개성이 꽤나 뚜렷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음에도 주변에서 하는 말들에 속절없이 흔들린다. 그럴수록 나는 남의 글을 읽고, 나의 글을 쓰며 예전에 썼던 글들을 읽는다. 나 자신을 올바로 세울 수 있는 길이 그것만인 것처럼 말이다. 아--- 나는 내 삶을 선택해가며 살 수 있을까. 남들이 선택해준, 혹은 원치 않는데 주어진 삶이 아니라 내가 바라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