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웅현의 <여덟 단어> 독서록, 관찰에 관하여
박웅현의 <여덟 단어>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책 중 하나다. 나중에 자식을 키운다면 해주고 싶은 이야기들이 박웅현의 책에 담겨있고, 나 자신도 삶이 흔들리고 허무해질 때 이 책을 읽는다.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라는 부제목을 갖고 있는 이 책은 자존, 본질, 고전, 견, 현재, 권위, 소통, 인생이라는 8가지 핵심 단어를 중심으로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진솔하게 펼쳐낸다.
3박 5일의 짧은 휴가 동안 난 이 책을 두 번 다시 읽었다. 쉬러 간 여행이기에 틈만 나면 책을 잡았고 무료한 시간에 잠깐 그림을 그리며 내 삶을 다시 돌아보았다. 올 한 해 반이 지났다. 정말 쉴 새 없이 놀았고, 싫은 생각은 밀고 재미없는 것은 무시해가며 조금은 현실과 동떨어진 삶을 누렸다. '열심히 살기 싫어!'를 강력히 주장하며 나의 놀 권리를 얼마나 내세웠던지. 이제는 일이 하고 싶었다.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미루지 않고 차근히 해내가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올바른 콩깍지를 쓰고자 '여덟 단어'를 되새김질해본다. 그중에 가장 다루고 싶었던 '견(見)', 시청이 아닌 관찰에 대한 내용을 적어보고자 한다.
수많은 시간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꽃들이 햇살을 어떻게 받는지
꽃들이 어둠을 어떻게 익히는지
외면한 채 한 곳을 바라보며
고작 버스나 기다렸다는 기억에
목이 멜 것이다
-조은, <언젠가는> 중에서
책에 나와있는 시 구절이다. 삼 년 전 이 책을 처음 읽을 땐, 박웅현 씨가 책에서 언급한 책과 시들을 거의 다 사서 봤었다. 나에게 영감을 줄 것이라 생각했고 실제로 다양한 고전과 소설, 수필들을 읽으면서 마음의 울림을 몇 번이나 경험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았던 것들은 '견' 파트에서 소개하는 시들과 '인생'파트의 '보왕삼매론'이었다. 보왕삼매론에 관해서는 다음에 더 얘기해보고 오늘은 깊게 바라보기에 대한 구절들을 옮겨 보려한다.
음미하는 능력이 부족했던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시 읽는 즐거움을 몰랐다. 시인들의 감수성은 내가 따라가기 어렵다 생각했고, 수능 때 언어영역 때문에 고생해서 그런지 현대시를 보면 머리 아픈 분석들이 줄줄이 이어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견'의 관점에서 시들를 다시 보게 되었다. 책에서 말하듯 '시간을 들여 천천히 바라보면 모든 것이 다 말을 걸고(119)' 있었다. 시험에 나오면 머리아파서 제일 싫어하던 이상의 시도 관찰하여 들여다 보니 작가의 마음이 느껴졌다. 이렇게 같은 것을 보고도 나의 태도에 따라 모든 것이 바뀌어 보인다.
작년 가을 제주도 여행을 할 때, 혼자 버스를 타고 다녔었다. 버스 배차간격이 보통 10분을 넘어가고, 종종 30분을 넘는 기다림도 있었다. 정류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지만 얘기할 사람도 없어 책을 읽을까, 음악을 들을까 하다 가만히 앉아서 문득 모든 것이 귀찮아 주변을 살펴봤었다. 아! 그 때 느꼈던 놀라움이란! 가을의 제주는 색감도, 소리도, 촉감도 정말 아름답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천천히 바라보면 나무가 변하는 과정도, 시간에 따라 색이 변하는 찰나들도 보였다. 그런 순간들은 어디 멋진 풍경을 보고서야 느낄 수 있을 거란 나의 어린 착각이 와르르 무너졌었다. 그 이후론 만날 가는 양재천도 다시 바라보게 되었고 훨씬 시선의 깊이가 깊어졌다.
그렇게 관찰엔 아낌없는 '시간과 애정'이 필요하다. 가히 정보의 홍수를 넘어 정보의 쓰나미라 칭할 만큼 지금 우리에겐 볼 것도, 읽을 것도 많다. 작은 스마트폰 하나면 전 세계 모든 언어의 논문부터 저 멀리 아프리카 대통령의 사소한 생각까지 볼 수 있는 것이 지금이다. 박웅현 씨는 책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순간들을 하나 둘 복기해보니 전부 경험이었습니다. 경험, 제가 보고 겪은 것들. 말하자면 그 아이디어들은 제가 본 것이 안면 나올 수가 없었던 겁니다.(105)'라고 하며 그 경험들을 깊이 새기길 조언한다. '우리의 대부분의 행동은 시청을 하는 거죠. (중략) 그런데 어느 순간 안도현은 간장게장을 견문을 한 거예요. 그 차이입니다. 흘려 보고 듣느냐, 깊이 보고 듣느냐의 차이.(110)' 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견문의 힘은 볼거리가 많은 우리 세대에게 더 큰 힘으로 다가온다. 경험을 많이 할 수 있는 세대인 만큼 그 것을 새기는 능력이 경쟁력이 된다. 결국, 견문의 힘이 페이스북, 에어비앤비 같은 서비스들을 만들어 냈고, 그 견문의 힘이 알파고를 넘는 인간의 최혜일 거라 생각한다.
여행을 다니면서 느꼈던 것 중에 하나가 '여행은 일상처럼, 일상은 여행처럼'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박웅현은 말한다, '어떤 순간에 내가 의미를 부여해주어야 그 순간이 내게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면 나의 삶은 의미 있는 순간의 합이 되는 것이고, 내가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나의 삶은 의미 없는 순간의 합이 되는 것이에요.(123)' 내가 한없이 의미 없어 보였을 때가 있다. 존재하는 이유를 아무리 고민해보아도 살아있는 것이 무기력했었다. 그때 나한테 왔던 이 책이 나를 더 관찰하게 했다. 나를 바라보고 나의 가족을 바라보고 내 옆을 스치는 풀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천천히 걸으며 천천히 이야기했고 그림을 그리며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전까지 스쳐갔던 것들을 볼 줄 알게 되면서 삶의 즐거운 순간들이 많아졌다.
최근에 악동뮤지션(AKMU)의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How People Move)>라는 음악의 가사를 들으며 이 친구들의 관찰력은 정말 세상을 뒤흔들 놀라움을 가졌다 생각했다.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 신기해
팔다리가 앞뒤로 막 움 움 움 움직이는 게
숨 크게 들이쉬면 갈비뼈 모양이 드러나는 것도
내쉬면 앞사람이 인상 팍 쓰며 코를 쥐어 막는 것도
놀라와 놀라와 놀라와
Amazing
익숙하다 못해 당연한 우리네들의 움직임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그것을 글과 음악으로 풀어낼 수 있는 능력이 정말 경탄스러웠다. 나는 이들처럼 천천히 바라보고 느끼면서 살고 싶다. 각각의 것들을 끝까지 바라보고 관찰할 수 있는 '견'의 힘, 그 힘이 내 삶을 의미 있게 만들기도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 주기도 하지 않을까.
<인용>
박웅현. 여덟 단어. 서울: (주)북하우스 퍼블리셔스,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