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렇게나 아무 때나
어묵탕
재료 : 아빠, 휴대폰
1 아빠에게 카톡을 한다.
2 어묵탕이 먹고 싶다고 보낸다.
3 아빠를 기다린다.
4 장을 봐 온 아빠를 맞이한다.
5 아빠가 어묵탕을 끓이는 걸 기다리며 논다.
6 아빠가 부르면 달려가 앉아서 먹는다.
아빠는 여러 음식들을 곧잘 해 줬지만
어묵탕은 내 주문으로 처음 만들기 시작하셨다.
그 후 어묵은 장 볼 때 필수품이 되었고
나에게는 아빠가 해 준 음식들 중
가장 좋아하는 음식 두 번째가 되었다.
(첫 번째는 닭죽.. TMI)
학교에서 가훈을 적어오라는 숙제를 받으면
아빠는 늘 ‘나보다 남을 생각하자’라고 불러줬다.
그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받아 적어 갔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빠는 운동경기를 볼 때도
늘 지고 있는 편을 드는 사람이었다.
아빠는 꽤 성공한 사람이면서도
언제나 운이 좋았다고 말했고
시골에 계신 큰아빠를, 속만 썩이는 작은 아빠를
끔찍하게 위하고 생각하며 미안해했던 것 같다.
친한 친구들이 전부 미혼이었던 몇 년 전,
그 시절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내 방에서 보낸 적이 있다.
친구들이 양손 가득 먹을 걸 사 왔고
나는 미리 주문한 케이크를 편의점에서 찾아왔다.
그날 내가 떡볶이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빠가 어묵탕을 한 솥 끓여줬던 것은 기억한다.
그날 어묵탕에 먹지 마세요라고 적힌
어묵 봉지에 들어있던 습기제거제가 같이 끓었던 것도.
떡볶이는 계절을 타지 않지만
어묵탕은 쌀쌀해지면 그제서 참 생각이 난다.
그리고 아빠는 자꾸만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떠오른다.
집밥 백 선생이 처음 방영되었을 때
여느 사람들처럼 나도 따라 만들어 보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옆에서 양파 껍질을 까 주고
무를 썰어 주고 홍합을 닦아준 건 아빠였다.
주말에는 같이 예배를 보고 마트에서 장을 봤다.
집에 와서 이것저것 같이 해 먹었다.
평일에도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아빠에게 카톡으로 알렸고
아빠는 엘리베이터 앞까지 다 와서 연락을 받아도
발걸음을 돌려 마트에서 장을 봐 왔다.
역 앞에서 파는 핫도그가 먹고 싶다는 내 연락에
걸어온 길을 다시 돌아갔던 비 오는 날도 있었다.
모두가 퍼질러져 쉬는 다 주말 밤에도
쥐포를 먹고 싶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 등등의 말에
점퍼의 지퍼를 잠그며 현관문을 나섰다.
결혼하게 될지 몰랐던 그해에
나는 엄마, 아빠 할 것 없이 가족들과 많이 다퉜다.
만사에 짜증만 나고 누구와도 마주하기 싫었다.
물론 더 이상 아빠와 요리를 하지도 않았고
밥도 잘 먹지 않았던 날들이 이어졌다.
나는 혼자 방에 틀어박혀서
퇴근길에 편의점에서 사 온 술이나 주전부리를,
아니면 택배로 받은 해외 과자며 초콜릿들을 먹었다.
그렇게 나온 종이 상자나 캔, 과자 봉지들은
아빠가 전부 분리수거했을 거다.
내가 마시고 버린 술 캔들을 보면서
아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가 갑자기 결혼하겠다고
이미 상견례를 앞둔 오빠보다 먼저 하겠다고
그것도 일본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
가족들 중 아빠만 유일하게
조금 천천히 그냥 내년에 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었다.
나는 내 모든 통보들 중에서 유일했던 아빠의 제안을,
아빠의 마음을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그날의 아빠 목소리와 아빠 표정이 가물가물하지만
마냥 들떠있던 내가 참 원망스럽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헤아려 보며
아빠가 그랬었지, 내가 그랬구나 하는 나는
나는 정말 뭐하는 애일까,
뭐 이렇게 막돼먹은 딸이 있을까.
이렇게만 남기면 내가 너무 괴로울 테니
그날의 나를 합리화하자면
엄마도 오빠도 전부 대찬성하며 하루빨리 가라고 했고
나는 이십 대 후반에서 서른을 넘기고 그동안 내내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로 너무 괴로웠다.
친척들도 교회에서도 엄마도 오빠의 상견례도
전부에서 도망가고 싶은 날들이 이어지던 터였다.
아빠는 나를 보낼 마음의 준비를 위해
시간이 아무리 더 주어진다고 해도
괜찮아질 리 없었을 거다.
차라리 갑작스러운 편이 더 나았을 거라고
내 마음대로 판단해 본다.
그리고 아빠는 지난달에 할아버지가 됐다.
내가 결혼을 하고, 오빠가 결혼을 하고
우리 가족의 30여 년 세월은 완전히 바뀌었다.
내 결혼으로, 새언니의 효도로 아빠의 세계도 바뀌었다.
그리고 이제 손녀딸을 안은 아빠의 세계는 또 어떨까?
고모가 된 나는 조카도 보고 싶지만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 엄마, 아빠의 모습은 더 보고 싶다.
가족 채팅방에 꾸준히 올라오는 사진과
감성 터지는 엄마의 말들을 보고 있지만
손녀를 보는 아빠의 표정과 행동 같은 게 궁금하다.
아니 사실은 요즘 매일 저녁마다 아빠가 궁금하다.
저녁은 뭘 드시는지, 저녁 먹고 뭘 하시는지.
캠핑을 하면서도 아빠가 궁금하다.
지금 같이 오기엔 너무 힘드실까,
그래도 이렇게 멋진 풍경 보면 좋아할 텐데.
날이 더 추워진다는데 또 아프진 않은지 이것저것.
나는 이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