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을 무릅쓰는 사랑을 마주할 용기

드니 빌 뵈브 <컨택트>

by 수수

언어는 사고의 도구라는 생각. 그래서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고 믿는 것에 대해 다시 떠올려봤다.

내가 좋은 말들, 좋은 문장들, 좋은 책들에 집착하는 이유는 좋은 언어들이 좋은 사고를 만들고 좋은 사고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는 믿음 때문이다.

게임으로 외계인과 소통을 시도하던 중국이 루이스의 예상처럼 승패로, 전쟁으로 이어지는 모습에서 씁쓸하지만 다시 무례한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선택한 소통의 도구, 그 자체가 태도를 보여 주기도 한다. 정말 겸손인가? 아니면 겸손을 가장한 교만인가. 단순하지 않다.

전쟁은 영웅을 만들지 못하고 과부만 만들 뿐이에요.
<컨택트> 중에서

진심으로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생명에게든 다정하게 대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공포와 협박은 사랑의 태도와는 정반대라고. 부모가 자녀를 보호하고자 쉽게 선택하는 윽박 지름은 결코 다정하지 않다. 그 사랑은 지혜롭지 못하고 신의 사랑과 닮지 않았다. 그래서 명백하게 사랑이 아니면서도 사랑을 가장한다. 가장된 사랑은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속인다. 그렇게 반복되는 거짓은 서로에게 위험하다. 절망은 절망을 반성하지 못한다.


風景(풍경)이 風景(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速度(속도)가 速度(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拙劣(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救援(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絶望(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_김수영 <절망>


보고 나서 여운이 많이 남는 영화였다. 그래서 한 번 더 보았는데 그때 더 재밌었다. 그래서 또 보고 싶어 졌다. 아마 세 번째 한 번만 더로 끝이 아니라 한 동안은 계속 다시 보게 될 듯싶다.


그리스인들이 비극을 오랫동안 마주했던 것처럼 나도 루이스가 선택하는 고통을 반복해서 마주하다 보면 루이스 같은 용기가 생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