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로망 '케이크' 황홀경

빵, 크림, 색채의 향연

by 카타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케이크는 생일날에만 먹을 수 있는 매우 특별한 음식이었다. 디저트로 케이크를 먹는다거나, 커피와 함께 먹으려고 조각케이크를 주문한다는 문화가 생경하던 시절. 케이크 위에는 지금처럼 부드럽고 가벼운 생크림이 아니라 입 안에서 제법 묵직한 느낌이 도는 버터크림이 올려졌다.


나는 케이크를 사랑했다. 어린아이였던 나의 눈에 케이크는 하나의 완벽한 예술작품 그 자체였다. 버터크림 자체를 좋아하지는 않아서 막상 한 조각도 채 먹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빵집에 들를 땐 늘 케이크가 진열된 유리문 앞에서 한 작품씩 꼼꼼히 감상을 마치곤 했다.


가족들 생일엔 늘 아버지가 케이크를 준비해 주셨다. 하얀색과 진한 갈색, 단 두 가지 색의 케이크만 판매했던 단출한 동네제과점에서 언니 생일엔 하얀색 케이크를, 나의 생일엔 진한 갈색 케이크를 먹을 수 있었다. 어릴 때 나는 초콜릿을 무척 좋아해서 진한 갈색의 물건을 보면 늘 초콜릿을 연상하곤 했다. 하지만 나의 진한 갈색 케이크가 갈색이 주는 초콜릿 느낌과는 달리 정작 맛은 초콜릿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케이크는 엄마의 생일날 아빠가 사 온 진한 주황색 케이크다. 우리 동네 빵집에서는 볼 수 없었던 아주 특별한 색감의 케이크. 아빠의 첫눈에 띈 이 녀석은 제과점 아저씨가 처음 시도해 본 케이크다. 처음 보는 빛깔의 케이크에 감탄하는 우리와 그런 케이크를 발 빠르게 영입하신 아버지의 흐뭇한 미소가 생생하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지금까지 그 주황색 케이크를 기억하는 사람은 나뿐이다. 나를 위해 준비된 녀석이 아니었음에도 어린 나에겐 그만큼 중요한 존재였던 모양이다. 나에게 케이크는 예술작품이었으니까.






시간이 흘러 예전처럼 우리의 생일을 기념하지 않게 되었다. 촛불을 켜고 노래를 부르는 의식은 생략된다. 우리 가족은 어느 누구도 그러한 사실을 섭섭해하지 않는다. <특별한 날의 이벤트가 전혀 중요하지 않은 진정한 어른이 된 것일까>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지만 돌아보면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특별한 날을 기념하고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어린 날 아빠가 우리의 케이크를 늘 챙겨주었던 것처럼, 이제는 언니와 내가 아버지의 생일날에 케이크를 챙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성껏 만찬을 준비하거나 특별한 외식을 하고 아버지에게 케이크를 감상할 시간을 충분히 드린 후 시식을 하곤 했다.


어릴 땐 아버지의 생일을 기념한 기억이 없다. 양말을 정성껏 포장해서 선물을 한 기억은 있지만 케이크를 준비한 기억은 없다. 아빠는 섭섭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성장한 이후 우리가 서로의 생일을 기념하지 않는다고 전혀 섭섭하지 않은 것처럼 아빠도 그런 마음이었을 수도 있겠다. 나는 어른이 되어 가족들의 생일케이크를 사다 나르는 것이 더없이 기뻤으니, 나와 꼭 닮은 아빠도 젊은 시절,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생일날이면 매년 다른 케이크를 준비했다. 어느 해는 생크림 과일케이크, 어느 해는 고구마케이크 등등. 감사하게도 늘 갓 지어진 케이크를 공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조각 케이크와 미니케이크가 유행한 이후로는 단품의 홀 케이크 대신 조각케이크나 미니케이크를 다양하게 준비하는 것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아버지에게 조금 더 다양한 맛과 디자인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은 그대로 적중했다.


퇴근길, 지역에서 유명한 베이커리에 들러 준비한 미니케이크들이 네모란 상자에 열을 지어 모양을 뽐낸다. 앙증맞은 크기의 미니 삼단 케이크, 크레뻬 케이크, 과일이 촘촘히 박혀있는 생크림케이크 등. 모두가 홀 케이크의 미니어처 모양으로 어느 예술작품 못지않다. 9개 정도 되는 미니케이크를 상자에 포장해 온다.


"밥 먹고 케이크 먹자!"는 우리들의 말에,

어릴 때 나와 같이, 케이크를 궁금해하는 아버지의 눈이 반짝인다. 상자를 열어 짜잔! 곧이어 요즘은 케이크가 이렇게 고급스럽게 만들어진다는 아버지의 감탄이 쏟아진다. 뭘 이렇게 많이..라는 말씀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 드디어 케이크를 먹을 시간. 어떤 케이크를 먼저 먹을지 아버지의 선택을 기다린다.


아버지는 아주 신중한 자세로 모든 케이크들을 꼼꼼하게 살펴본다.

"이건 뭐냐? 이건 무슨 맛이냐?"

나와 정말 똑 닮은 아빠는 궁금한 것들이 많다. 어차피 모두 우리가 먹을 케이크들인데도.


"아.. 그건 초콜릿을 얇게 만든 거야."

"아.. 그건 체리 절인 거야.."

미니케이크들의 간단한 프로필 설명이 끝나면 신중하게 고른 순서대로 케이크들을 나눠 먹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다.


"하나 더 먹을까?"

"딱 하나만 더 먹자."

"하나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허허.. 그럼 딱 하나만 더 꺼내봐라."

"그냥 오늘 다 먹을까?"

뭘 그렇게 많이도 사 왔냐는 아빠의 말과 보는 것은 좋아하는데 먹는 것은 딱히 좋아하지 않아요 라는 그간의 말들이 무색한 시간이다.






오래전 찍었던 사진 중에서 케이크 사진을 찾아보니 기억에도 없는 다양한 케이크 사진들이 소환되었다. 어린아이 일 때부터 시작된 케이크에 대한 로망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상의 곳곳에서 발현된다. 화려한 캐릭터 모양의 케이크부터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모양의 과일 케이크, 작지만 예쁘게 프로스팅이 올려진 색색가지 컵케이크, 케이크는 아니지만 케이크 모양으로 쌓아놓은 마카롱까지. 나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케이크를 좋아하는 듯하다. 뒤늦은 자아발견. 사진으로 남겨둔 기록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먹는 것보다 보는 것이 더 행복한 케이크 파티다.



케이크를 준비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아버지도 나만큼이나 심미적인 것을 아주 좋아하는 분이었다는 것. 다양한 색상과 디자인으로 꾸며진 화려한 미니 케이크 앞에서 나이 든 아버지의 눈이 반짝이고 입이 귀에 걸린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사들고 오신 케이크 앞에서 나의 눈과 입도 꼭 저렇게 반짝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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