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와 내가 적극적으로 의기투합해서 계획한 첫 여행의 목적지는 '부산'이었다. 우리 가족은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고는 한 장소에서 며칠씩 머무르는 여행 경험이 많지 않았고 나는 그 점이 늘 아쉬웠다. 언니는 부산 여행을 다녀온 지인을 통해 가이드 한 분을 안내받았고, 덕분에 별다른 계획 없이도 편안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나는 회사에서 받은 상여금으로 호텔을 예약했다. '유일하게' 못하는 것이 여행계획인 아버지는 당신의 두 딸이 준비한 여행에 매우 행복해하셨고, 우리는 매년 가족 여행을 계획해 보자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성공적인 부산 여행 이후로 아버지가 나이를 더 드시기 전에 매년 해외여행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전까지 언니와 나는 해외여행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마음 한 구석, 국외 여행에 대한 로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생경한 곳,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 있다 보면 인생에 있어서 다른 무언가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 같은 것이 자리 잡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첫 해외 여행지로 홍콩을 선택했다. 나는 고소공포증이 심해서 비행기 안에서 편안히 휴식을 취하지 못한다. 상공에 떠 있는 시간, 모든 불안감과 압박감이 엄습해 온다. 그러니 첫 여행지는 가까운 나라 중 한 곳을 택하고 싶었다. 또 다른 이유는 아버지와 함께 하는 여행이기에 이동이 불편하지 않을 만한 곳, 위생상태가 좋은 장소를 원했고, 그런 나라 중 물망에 오른 곳이 홍콩이었다. 홍콩의 매력에 푹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많이 접했기 때문에 긍정적인 이미지가 많이 쌓여 있던 것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몇 달 후 첫 해외여행을 향한 설렌 마음을 안고 홍콩행 비행기에 올랐다. 여행사에 가이드와 호텔, 비행기 예약을 부탁했지만 정작 가이드는 연결받지 못하고 호텔과 비행기에 관한 정보만 제공받고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비행기에 탑승한 지 3시간 30분 후 낯선 홍콩 땅에 도착. 다시 택시를 타고 호텔에 도착. 국외라는 긴장감에 비해 턱없이 싱거운 시작이라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낯선 곳에서 차근차근 소소한 미션들을 해결하던 중 체크인 과정에서 첫 번째 난관에 봉착했다. 아버지 이름으로 두 개의 방이 예약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직접 예약한 것은 아니지만 이미 그렇게 예약이 되었다 하니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싶을 때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분이 같은 호텔에 묵을 예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명이인이 같은 날 같은 시간 대에 체크인을 할 예정이었던 것이다.
별 것 아닌 일이지만 대단히 별 것같이 느껴졌던 해프닝이 지나가고 체크인 시간이 될 때까지 호텔에 짐을 맡기고 바로 옆 쇼핑몰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언어와 문자, 이질적인 공기와 습도 등 모든 게 생경했지만 그 생경함은 아이러니하게도 묘한 편안함을 동반했다. 그런데 식사를 하고 들어오니 이번에는 호텔 측에서 룸으로 옮겨주기로 한 우리의 짐이 사라졌다. 두 번째 난관이 찾아온 것이다. 프런트에 연락해서 약속한 짐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리자, 인상 좋게 생긴 직원이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허겁지겁 찾아온 짐을 옮겨 주었다. 다른 방에 짐을 가져다 놓았다고 설명한다. 아버지와 동명이인이라는 손님방에 가져다 놓았던 모양이다. 누구도 의도치 않았던 일들이 갑자기 발생했다가 얼렁뚱땅 저절로 소멸되는 일련의 모든 과정이 다행스럽게 느껴지면서도 마음의 피로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런 해프닝이 진정한(?) 여행의 묘미지> 하는 여행가스러운 생각도 살짝 스치면서.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다. 모든 것이 준비 부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여행일정은 가고 싶은 장소만 정해둔다고 알아서 척척 움직여지는 것이 아님을 현장에 도착해서야 경험하게 된 것이다. 호텔에서 목적지까지 움직일 교통수단, 이동거리와 시간 등을 충분히 예상했어야 하는데 그런 준비들이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았다. 여행계획이 부족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우리는 다소 무기력해졌다. 가장 걱정했던 '언어' 문제는 오히려 아주 작은 고민에 불과했다. 여행객 신분으로 긴 의사소통이 필요한 경우는 많지 않으니까.
결국 우리는 홍콩에 머물렀던 3박 4일 중 이틀 동안은 미드웨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우연히' 타이청 베이커리의 에그타르트를 발견해서 먹고, 쇼핑몰 지하에 있는 마트에서 현란한 디저트와 식재료를 구경하고, 동상 하나가 덜렁 서 있는 광장에 가서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우연히' 들른 성당에서는 묵주와 십자가 상을 구입했고, 덥고 습한 기후의 거리를 정처 없이 걷다가 호텔 주변 쇼핑몰을 거닐며 여행 일정을 보내야 했다. 아쉽고 아쉬웠다.
돌아보니 아쉬움과 그리움 등 복잡한 감정이 점철된 우리의 홍콩 여행은 '애프터 눈 티'로 기억된다. 전통적인 애프터눈 티를 기대했지만 뷔페식 서비스와 큰 차별점이 없어서 조금은 아쉬웠던 애프터눈 티에 대한 추억, 우연히 발견한 홍콩공원 내 록차티 하우스의 따뜻한 차 한 잔, 그리고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해 준와인과 하몽.
애프터 눈 티의 경험은 다소 심심한 기억을 남겼다. 지나고 생각해 보면 애프터눈 티가 별 건가. <점심과 저녁 사이의 애매한 시간대에 간식거리와 차 한 잔 대령하면 그것이 애프터눈 티인 것이지>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러나 한 번쯤은 외국에서 경험해 보고 싶었던 그런 문화. 하지만 현실 속 애프터눈 티는 뷔페서비스의 다른 이름일 정도로 큰 차별점이 없어서 조금 싱거웠다.
우리들의 진정한 애프터눈 티는 홍콩공원의 '록차티하우스'에서였다. 여행의 마지막 날, 조금이라도 아쉬움을 덜어내기 위해 향한 홍콩 공원. 마침 록차티 하우스를 바로 발견해서 자리를 잡았다. 구태여 애프터눈 티로 명명하지 않아도 우리는 점심과 저녁의 중간 시간대에 차 한 찬과 간단한 다과를 즐겼으니 이것이 진정한 애프터눈 티가 아닌가. 차 한 포트와 두 가지 다과를 주문했는데 모락모락 김이 오른 찐빵이 먼저 등장했다. 생각했던 메뉴는 아니었지만 <외국인이었던 우리가 메뉴를 오해(!)했나 보군> 생각하던 찰나, 실수에 비해 매우 침착한 표정의 점원이 혼잣말을 하면서 찐빵을 도로 회수해 간다. 영어가 아닌 말이니 알아들을 수 없어 다른 테이블로 옮겨간 찐빵을 바라보며 잘못 서빙되었나 보다 짐작할 수밖에. 또 하나의 해프닝이 혼자서 발생했다가 자동으로 소멸되었다. 그렇게 이방의 공간에서 처음으로 외국인이 된 낯선 경험과 홍콩의 정취에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지만 하룻밤이 지나면 다시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야 한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 근처 쇼핑몰에 들러 와인과 하몽을 구매했다. 홍콩에서의 마지막 밤. 좌충우돌이었던 3박 4일의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머무를 날이 더 남아있다면 여행다운 시간을 재미있게 보낼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몰려왔다. 우리는 홍콩의 야경을 바라보며 아버지가 고른 하몽을 안주 삼아 와인을 마시며 아쉬움을 달랬다.
"이런 게 경험이 되어서 나중에 아빠가 없을 때, 너희들끼리 또 오기도 하고 그럴 수 있는 거지."
아버지는 어설픈 여행의 끝에 우리를 위로한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아쉬움은 한동안 계속 마음을 맴돌았다. 비행기와 호텔 안에서 열심히 읽었던 홍콩 여행 책자를 뒤늦게 다시 탐독하고, 다른 사람들의 블로그를 떠돌며 지난 여행을 반성했다. 나의 아쉬움은 비단 준비 없이 떠난 3박 4일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다. 더 큰 아쉬움은 노년의 아버지를 배려하지 못한 여행이 되어버렸다는 것에서 출발했다. 복잡한 홍콩의 거리에서 아버지의 노년을 비로소 실감한 것이다.
아버지는 비슷한 연배의 어르신들보다 건장한 체격에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문해력도 남달라서 보통의 젊은이들보다 빼어난 판단력과 실행력을 보여주었기에 아버지의 나이를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홍콩에서의 아버지는 덥고 습한 기후에 적응하기 힘들어하고 다소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셨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모습이다. 낯선 이국땅을 밟아서야 아버지가 노년에 접어든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했다. 내 아버지의 건강을 얼마나 자신했던가. 아버지의 총기가 보통의 젊은이 이상이라고 한들, 신체 나이는 노년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 마음은 살아오면서 내가 아버지에게 느꼈던 미안함의 감정 중 어쩌면 가장 진하게 남아있는 기억이다.
아쉬움이 산더미 같았던 시간이었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홍콩을 그리워한다. 나에게 홍콩은 놓쳐버린 첫사랑 같은 느낌의 곳이다. 사실 인간 첫사랑은 누구였더라 싶을 정도로 세월의 풍파에 스러져갔지만 홍콩에 대한 마음은 짝사랑처럼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존재한다.
그렇게 우리는 아쉬움을 진하게 남긴 첫 번째 여행페이지를 접고, 새로운 여행을 계획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