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로맹 가리, <자기 앞의 생>
로맹 가리가 쓴 <자기 앞의 생>(원제: La vie devant soi)은 예전부터 읽고 싶은 책 목록에 있었으나 제대로 읽을 기회가 없었다. 학부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서가에 꽂혀 있던 책을 집어 들었던 기억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앞부분 밖에 읽지 못했다. 그러다 지난달 무렵 이 책을 다시 만났다.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음에도 왠지 이 책은 시간을 내서라도 찬찬히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책을 읽을 때 머리가 앞서는 편이다. 문장을 느낌대로 읽고 싶어도 텍스트를 분석하면서 읽는 게 습관으로 굳어서 눈물을 잘 흘리지도 않고, 눈물이 나오려 해도 참는다. 그래서 책을 읽다 운 적은 손에 꼽는다. 그런데 <자기 앞의 생>은 달랐다. 슬픈 결말로 향할 걸 알면서도 읽기를 멈출 수 없었고, 읽으면서 머릿속에서 영화 필름을 돌리다 눈물을 참느라 혼났다. 머리로 읽으면 로자 아줌마가 죽은 뒤 모모가 한 행동은 애정 결핍이라 해도 상식적이지 않고 엽기적이기까지 한데 엄마야, 왜 이렇게 슬프지?
이 책을 읽는 내내 눈의 띄었던 단어는 ‘벨빌’(Belleville)이다. ‘벨빌’이란 장소명이 읽자마자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벨빌은 우리말로 ‘아름다운 마을’을 뜻한다. 하지만 전혀 아름답지 않다. 프랑스 대도시 파리에서도 사회경제적 최하층에 속하는 이주노동자, 고아, 매춘부들이 모인 곳이다. 사회 제도와 안전망에서 벗어나 있는 이들은 복지 혜택과 법적 보호도 제대로 받지 못한다. 받으려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가 오히려 불이익을 당하는 위치에 있다. 모모도 이러한 벨빌에 사는 아랍인이라는 이유로 나딘의 집에 갔다가 그 집 아이들에게 대놓고 따가운 시선과 무시를 받는다.
하지만 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이별이 가까워올수록 ‘벨빌’은 그 자체로 역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움은 겉에 아닌 속에 있었다. 중상류층, 사회 고위 지도자마저 외면하는 고통스러운 밑바닥이지만 그곳에 사랑, 연민, 연대는 풀뿌리처럼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파리에서 가장 가난하고 어두운 곳에 가장 밝은 사랑이 있었다. 자움 씨네 형제가 병들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로자 아줌마를 직접 1층까지 데리고 내려와 파리 시내를 드라이브할 때, 로자 아줌마가 모모를 버리고 떠난 친부 유세프 카디르를 모세를 앞세워 한 방 먹일 때, 로자 아줌마가 낫길 바라며 왈룸바 씨가 지인들을 데려와 불쇼를 하고 춤추고 노래 부를 때, 로자 아줌마가 숨을 거둔 뒤에도 모모가 아줌마를 매일 정성껏 화장해 줄 때, 벨빌은 본래 의미를 되찾는다.
이 ‘벨빌의 역설을 극대화한 것은 모모와 로자 아줌마가 사는 아파트에 자리한 ’유대인 지하실’이었다. 아우슈비츠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뒤 평생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로자 아줌마는 자신의 마지막을 앞두고 모모에게 자신을 지하실로 데려다 달라고 말한다. 그런 로자 아줌마의 곁을 모모가 지킨다. 여기서 해바라기가 부른 <사랑으로>의 가사를 떠올린다.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로자 아줌마가 죽어갈 때는 카츠 아저씨, 하밀 할아버지, 왈룸바 씨, 자움 씨네 형제 등 여러 사람들이 함께 했지만 그녀가 죽은 뒤에도 끝까지 곁에 있었던 사람은 모모뿐이다. 아줌마의 곁에 남기로 결심한 순간 열네 살 모모는 마음마저 훌쩍 커버린 진짜 어른이 된다. 모모가 로자 아줌마에게 느끼는 정과 사랑은 혈연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동시에 아파트에서도 가장 어두운 ‘유대인 지하실’은 가장 밝은 곳이 된다. 촛불로 밝게 빛나는 유대인 지하실로 ‘벨빌’은 ‘사랑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재정의된다.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벨빌‘이 전하는 역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