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다닐 때 공부 꽤나 하셨죠?"
사람들을 만나면 한 번씩 듣는 말이었다. 하지만 보이는 이미지와는 달리 내 청소년은 방랑과 반사회성 그 자체였다. 세상 안팎은 내게 소란 덩어리 그 자체였다. 중학교 2학년 때 무렵, 종례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그 누구보다 빠르게 교문을 빠져나와, 집 앞에 있는 정자에 드러누었다. 그리고 MP3에서 좋아하는 음악에 침잠하는 것이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멀리서 재잘재잘 수다 떠는 소리가 들려오면, 거부감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곧장 집으로 숨어버리곤 했다. 때떄로 집에서도 숨어버리곤 했다. 엄마와 동생이 사라진 나를 찾느라 온 집안을 뒤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옷장 깊숙이 몸을 웅크린 채 나오지 않았다. 나를 찾는 가족의 목소리에서 묘한 안도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그저 좁고 어두운 옷장이 세상 그 어디보다 편안했다. 그 안락함을 깨고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이 내겐 가장 힘든 일이었다. 세상은 내게 소음 덩어리였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본래 다정한 소리들로 채워져 있었다. 나를 감싸던 엄마의 부드러운 옷깃 소리, 아빠의 따뜻한 웃음소리, 촉감에서도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언니, 언니"라고 부르며 내 손을 잡던 동생의 고사리 손길은 사랑스러운 소리였다. 그땐 세상에서 나는 소리가 소음이 아니었다.하지만 그 따뜻한 기억들은 폭력의 기억과 뒤섞이며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어린 시절의 신체적 폭력에 청소년기의 언어폭력이 더해졌다.
가족이 충분히 소란스럽고 혼란스러웠던 내게, 학교마저 숨통이 트이는 곳은 아니었다. 용기 내어 다가간 친구와의 관계가 '쌍쌍바 같다'는 타인의 조롱 탓에 어그러지고, 결국 내가 먼저 그 친구를 외면해버렸을 때의 자책감 때문만도, 성적에 대한 압박 때문만도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자신에게 혐오감이 드는데, 그러면서도 나를 사랑하고 싶은 그 혼란 때문었다. 그리고 그 마음을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다는 절망감이었다. 쩍쩍 갈라진 가뭄의 땅에 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는 메마른 기분이었다. 무력감이었다.
방관하는 아빠와 내 화풀이 대상이 되어버린 동생 사이에서, 그나마 상호작용이 가능했던 건 엄마였다. 하지만 그 관계는 지독하게 역기능적이었다. 왕따 사실을 고백했을 때 엄마는 "네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냐"고 되물었다. 90점을 받아도 "더 잘해야지"라는 채찍질이 돌아왔고, 힘들어서 울부짖는 내게 "잘한다, 잘해"라며 조롱을 던지기도 했다. 내 마음밭의 수분은 그렇게 완전히 증발해 버렸다.
16살이 되던 해, 학교를 나가지 않기 시작했다. 집에서 게임만 했다. 집이 싫어 가출도 일삼았다. 오래간만에 학교 교실에 들어서면 냉랭한 분위기가 나를 감쌌다. 그 누구도 나를 환영하지 않는 그런 슬프도록 시린 분위기였다. 나도 잘하고 싶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 당시엔 나도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담임선생님이 엎드려뻗치라고 했고, 엎드려뻗쳤다. 일어나라고 해서, 일어났다. 뭘 잘못했는지 아냐는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 한숨 뒤에 다시 교실로 들어간 선생님. 복도에 나를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며칠 뒤 선생님의 답변은 엄마를 통해 듣게 되었다. '나는 저런 애 가르치치 못하겠다'라고 했다, 고. 나는 전학을 가야 했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멈춰 서 있던 내게, 수분이 없어 움직일 힘 조차 없던 내게, 사회는 나를 거부하기만 하는 것만 같았다. 꽤 쓰리고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