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아빠

by 이면

동생과 장롱 안을 헤집으며 놀던 어느 날, 빛바랜 편지들로 가득 찬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엄마와 아빠가 뜨겁게 연애하던 시절, 아빠가 엄마에게 보낸 연서(戀書)들이었다. 우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편지를 하나씩 꺼내 읽기 시작했다. 처음엔 유치하다며 "얼레리꼴레리" 키득거렸지만,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설명하기 어려운 뭉클함이 밀려왔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문장이 하나 있다. 아빠가 엄마와 다툰 뒤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았을 그 대목이다.


사랑하는 당신,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대요.
우리 사랑에도 비가 내렸지만, 더 단단해질 거라 믿어요.
그리고 곧 무지개를 보게 되겠지요.

정확한 어구(語句)는 아닐지 몰라도,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10년도 더 된 편지였지만,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아빠의 마음이 시공간을 넘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이 신기하다. 아빠의 편지는 늘 그랬다. 글자를 읽는다기보다, '글이라는 사진'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나는 유독 아빠의 정갈한 필체를 좋아했다. 20대 후반에는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팍에 아빠의 필체로 "OO야, 사랑해"라는 문신을 새길까 진지하게 고민했을 정도였다.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나는 아빠의 글씨로 사랑받았던 그 감각을 마음 깊숙이 여운으로 간직하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아빠가 달력 뒷면에 세로로 적어준 짧은 축시처럼 말이다.


수고했다.
힘찬 날갯짓으로
빛나는 미래를 향해 날아가 보자.


문득 아빠가 우리에게 준 사랑이 그분의 글씨와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꾹꾹 눌러 담은 진심은 실체가 되어 우리 삶을 지탱한다. 아빠의 사랑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각박한 세상을 견디게 해 주었고, 그가 묵묵히 지켜낸 책임감은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어 우리가 마음껏 먹고 자며 꿈꿀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이제, 그 보금자리가 거꾸로 아빠를 지켜주고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평생을 버티던 아빠가 이제야 당신이 일군 보금자리 안에서 가족에게 조금씩 기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아빠의 모습을 보며 유대와 애정 표현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는다. 안부를 묻는 다정한 말 한마디, 어깨를 다독이는 부드러운 손길, 그리고 서로의 꿈과 감정을 투명하게 나누는 시간들.


우리는 그렇게 함께 가꾸어 가고 있다. 서로의 온기가 머무는 다정한 틈새를. 그 공간이 언제나 화사한 핑크빛일 수는 없을 것이다. 진정한 편안함이란 분홍과 붉은빛뿐만 아니라, 때로는 시리고 어두운 회색빛까지도 기꺼이 공유할 때 완성된다고 믿는다. 아빠는 지금 그 틈새 안에서, 당신만의 단단한 필체로 인생의 다음 장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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