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빠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저녁을 먹다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갑자기 호되게 혼났던 기억, 어떤 날은 왜 혼나는지도 모른 채 추운 겨울 속옷 차림으로 쫓겨났던 기억, 엄마도 있었고 나이 차이 많이 나는 형도 있었지만 막상 장래를 결정해야 할 때 물어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기억. 한 소년이 평생 품어온 고독의 파편들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어린 시절을 더듬어 꺼내는 아빠를 보며, 나는 회피하고 싶은 현재가 종종 고립되었던 과거를 불러온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일을 해야 하긴 했지만, 더 이상 돈 걱정을 크게 하지 않아도 될 만큼은 살아가고 있던 시기였다. 여윳돈이 있어 주식을 해보려다 투자 리딩방 사기를 당했다. 그 일로 아빠는 노후 자금을 모두 잃었다. 한순간에 평생이라는 세월을 날치기당했다. 혼자서 해결해 보려다 이자와 빚을 더는 감당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아빠는 가족들 앞에서, 특히 엄마 앞에서 한없이 약해졌다. 허공을 응시한 채 식탁에 가만히 앉아 있기도 했고, 밥을 먹다 말고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아빠'라는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유독 사회 구조를 생각하게 된다. 사회적 배제는 인간이 느끼는 가장 본질적인 공포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오랫동안 낭만적으로 작동해 온 이유 역시, 이 공포를 어느 정도는 완화해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의무는 우리에게 사회의 일원이라는 소속감을 부여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소속이라는 생존의 조건이 충족된 이후에는 정서가 채워지는 경험 또한 필요하다. 적당히 괴롭고, 적당히 힘들고, 적당히 부담스러운 삶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그리고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다면, 멀리 보았을 때 그 삶은 충분히 행복한 삶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요즘은 이런 정서적 공백을 파고드는 범죄가 적지 않다. 충만한 사회 구조 속에서 결핍된 정서들, 외로움, 절박함, 조급함, 기대감처럼 이름 붙일 수 있는 감정들이 모두 표적이 된다. 이런 현상들을 보며 성실히 그 사회 구조 안에서 열심히 살아온 개인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어쩌면 더 많은 성취가 아니라 정서적 교류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빠의 경우는 외로움, 절박함, 조급함이라는 정서 결여로 사기를 당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동안 재산을 잘 가꿔왔다는 자부심, 자신감, 이제는 조금 쉬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아주 평범한 마음들이었다. 마치 그 감정을 제대로 다뤄본 적이 없어서 한순간 미끄러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다 해도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온, 그러나 외로웠던 한 소년에게는 너무 가혹한 결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