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비일상
뜨거운 여름날 일요일 점심 무렵이었다.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어머니로부터의 전화였다. 한참의 울음 끝에 입을 떼셨다. ""C가 죽었데" 그리고 또 한참을 우셔서 대화가 되지 않았다. 나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C는 4살 터울의 남동생이다. 약 1년 여 전에 집을 나간 후 연락이 잘 되지 않았었다. 여러 방법을 통해 부산에 있다는 소재만 겨우 파악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직 20대인 동생이 갑자기 죽었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일단 본가로 향했다. 운전을 하면서도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아니 현실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뇌만 붕 떠 있는 기분으로 생각이 이리저리 돌았다. 본가에 도착하니 어머니는 반쯤 실신한 상황이었다. 어머니 휴대전화를 열어 연락 온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부산XX경찰서 형사라며 전화를 받았다. 일단 그 말을 꺼내야 했다. 동생이 죽은 게 사실이냐. 끓어오르는 울음을 가까스로 참으며 물었다. 본인 확인은 어떻게 했냐. 필사적으로 부정해 보았지만 경찰서에서는 신분증을 통해 본인 확인을 마쳤다고 했다. 일단 와보셔야 할 것 같다며 형사는 마을 이어갔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에 동생의 사인을 물었다. 자살로 추정된다고 한다. 집 앞에서 나는 다리가 풀려 풀썩 주저앉았다.
누군가는 이 일을 이끌어가야 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어찌할 수 없는 현실에 굳어 계셨다. 나는 형사에게 경찰서 위치와 찾아갈 곳을 안내받았다. 다행히 부산역에서 멀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가야겠다는 마음에 차를 끌고 갈까 했지만 제대로 운전할 자신이 없었다. 자꾸만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고 손이 떨렸다. 가장 빠른 SRT를 예약하고 택시를 불러 부모님을 모시고 수서역으로 향했다. 쓰러지려 하시는 어머니를 부축해 가며 겨우겨우 기차에 탔다. 3시간도 되지 않는 열차시간이 무한처럼 느껴졌다. 아직까지도 나는 동생이 죽은 게 믿기지 않았기에 눈물도 나지 않았다. 다만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고 잠도 오지 않았다.
부산역에 도착해 경찰서로 향했다. 담당 형사를 만나서 현장 사진을 보았다. 1년을 넘게 못 보던 동생이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었다.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며 손끝이 싸늘해졌다. 나도 인지 못하는 사이에 눈물이 흘렀다. 진술이 필요하다고 하여 부모님은 한편에 앉혀두고 조사실에 들어갔다. 동생의 사인은 추락사였다. 자살로 추정된 이유는 거주지에서 창문과 문틈을 다 막고 번개탄을 피웠고, 못 견디고 뛰어내린 게 확인되어서였다. 머릿속에는 씨발 씨발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왜 도대체 왜 그런 선택을 한 거냐고 멱살을 잡고 따지고만 싶었다.
형사가 물었다 가족 관계에 대하여, 그리고 생활에 대하여. 그리고 답변하며 깨달았다. 나는 동생에 대해 정말 아는 게 아무것도 없구나. 동생을 원망하기 전에 나는 동생을 알려는 노력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미안해졌다. 동생이 가면성 우울증 진단을 받은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그 후 1-2년 치료를 받고 나서는 괜찮아졌다고 여겨졌다. 대학교를 진학하고 졸업할 때까지 교유관계도 잘 쌓고 알바도 하며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대학교 졸업 후 취업에 실패하며 부모님과 마찰이 잦아졌다. 가족끼리 집단 심리 상담도 받아 보았지만 동생의 거부로 결국 중단되었다.
그러다 동생은 일방적 통보 후 집을 나갔다. 아버지가 입원했을 때 한 연락조차도 받지 않았다. 카톡으로 문자로 연락해도 일체 답장이 없었다. 하도 답답하여 카카오페이로 돈을 입금하며 살아있는지라도 연락 달라고 하니 아버지에게 문자 한 통이 왔었다. 부산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와있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조금만 기다려 달란 동생은 6개월여 만에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경찰서 절차를 마치고 부검은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동생의 발자취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