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간 사람의 흔적
방에 발을 들이기 전부터 번개탄의 매캐한 냄새가 뾰족하게 코를 찔렀다. 동생은 이걸 견디지 못하다 추락했구나 하는 생각에 멍해졌다. 방 안은 엉망이었다. 정리가 전혀 되지 않았고 쓰레기와 음식물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침대 옆에는 비워진 소주병과 브루스타, 미쳐 다 타지 않은 번개탄이 보였다. 경찰 조사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길래 밥을 굶었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냉장고와 곳곳에 먹거리가 많았다. 문틀과 창틀이 꼼꼼하게도 테이프로 막아져 있었다. 화장실 하수구까지 꼼꼼하게도 막아놨다. 조금만 덜 치밀했다면 미수로 그쳤었다면 하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동생도 살고 싶어 했다. 견디지 못하고 막아놨던 창문을 열고 살고자 했다. 그 사실이 마음 아팠다.
부모님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셨다. C가 그럴 리 없다고 타살의 증거를 찾으려 하셨다. 그러다 브루스타 옆의 눈물을 닦은 듯한 휴지뭉치를 발견하고는 말을 잃으셨다. 동생의 마지막 흔적의 부스러기들을 필사적으로 챙겼다. 조금이라도 동생이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알고 싶었다. 답답했다. 경찰서에서 들은 경제적 어려움이란 간단한 설명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큰 빚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자신 앞으로 부모님이 들어주신 적금도 있었다. 하지만 동생은 가족 중 누구에게도 아니 아무에게도 단 한 줄의 문자도 편지도 남기지 않고 그렇게 떠났다.
그게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몇 년을 함께 알바 한 동료들에게도 부산으로 떠나 온 이후에는 연락을 끊었다고 한다. 경찰의 포렌식 결과로 가까이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일한 피붙이인 가족과도 연을 끊듯이 지냈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을 해주지 그랬냐고 원망스러웠다. 집을 나가기 전에도 C가 카드론 빚을 진 걸 갚아줬었다. 그러며 차라리 나한테 돈을 빌려달라고 하라고 했지만 동생은 그러지 않았다. 나는 C에게 연결된 존재가 아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초등학생 동생이 유치원생 때가 생각났다. 나는 동생이 정말 좋았다. 학교 급식에서 먹은 새우튀김이 너무 맛있어서 수저통에 담아와서 동생을 주고는 했다. 250원 버스 차비를 아껴 모은 돈으로 동생이 좋아하는 롤케이크를 생일 때 사주기도 했다. 어릴 적 딱 한번 동생에게 폭력을 휘두른 적이 있다. 동생에게 태권도장을 같이 가자 했는데 무작정 안 가자는 동생을 베개로 때려서 귀에 멍이 들었었다. 너무 후회됐다. 동생이 군대 가기 전 어머니 일을 도와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치고받고 싸우기도 했었다. 그때였을까.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서로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동생이 중학교 시절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돌아오자 나는 군대를 갔다 그렇게 5~6년을 떨어져 지내다 보니 서로 그저 소 닭 보듯 지냈다. 형제들은 으레 그렇다 생각했다. 나 또한 취업에 실패해 봤기에 동생이 힘들 거라는 생각에 그래도 여행이라도 보내주고 용돈을 쥐어줬다. 그거면 내 의무를 다하는 줄 알았다. 동생이 원한 건 그런 게 아니었는데.
오피스텔 주인과 밀린 월세와 사후 처리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명함을 주고 병원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