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대 초반, 나는 택배 상하차 일을 했다. 우연한 기회로 우편집중국(택배를 한 곳으로 모으는 곳)에 정직원으로 들어갔고, '발착계'라는 부서에 배치되었다. 쉽게 말해 도착한 택배를 컨베이어벨트까지 옮기는 일이었다. 마흔쯤으로 보이는 안경 낀 아저씨와 이십대 후반에 갤로퍼를 끌고 다니는 형이 그곳에 있었다. 안경 아저씨는 내가 일을 빨리 익히도록 도와줬고, 갤로퍼 형은 퇴근길에 나를 집 근처까지 매일 태워주었다. 모두 내게 좋은 사람들이었다.
일은 쉽지 않았다.
특히 우체국 택배의 특성상 시골에서 올라오는 쌀과 과일 박스는 늘 예고 없이 찾아왔다. 트럭 문을 열기 전까지는 안에 무엇이 실려 있는지 알 수 없었고, 40킬로짜리 쌀포대가 가득한 차를 만나는 날이면, 우리는 서로를 보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팔은 아프고 허리는 욱신거렸지만, 젊어 그런지 다음 날이면 다시 출근할 수 있을 만큼의 고통이었다
그렇게 버틸만하다 생각하며 일하던 중 택배 업계에서는 가장 큰 시련의 기간이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명절 전 시작되는 대규모 배송 전쟁이었다. 이 시기에는 평소보다 물량이 체감상 다섯 배 이상 되는 것 같았다. 그뿐인가 트럭 문을 여는 족족 각종 쌀과 농수산물 선물세트가 가득 담겨오니,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나는 놀란 몸과 마음을 진정해야 했지만, 우체국 입장에서는 한두 번 겪어보는 명절이 아니었기에, 당연히 이런 시기를 돌파해 갈 해결책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일일 알바를 대규모로 채용하는 것이었다. 명절이 임박하자 수십 명의 장정이 우편집중국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마치 전쟁에서 한창 밀리고 있는 우리 편을 돕기 위해 등장한 외국 용병들 같았다. 그들은 우리가 택배를 빠르게 무찌를 수 있도록 곳곳에 배치되었다. 정말 든든했다. 그들도 돈을 받고 일할테지만, 기꺼이 나의 고통을 나누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고마운 마음까지 드려했다.
그때 안경 아저씨가 한 곳에 몰려있는 일일 알바생들을 보며 말했다.
- 알바생들의 이름을 절대 물어보지 마. 그러면 정 들어서 일 못 시킨다.
나는 안경 아저씨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신 고개를 들어 안경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얼마나 오랜 세월 이곳에서 많은 사람과 물건을 스쳐 보냈을까. 그에게 '저 무리'의 사람들과 수많은 택배는 어떤 의미였을까. 너무 많은 인연에 연연하지 말자는 것인지, 그들은 도구로 보자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뜻이 있는 것인지 어린 나는 다 알지 못했다. 대신 안경 아저씨의 나를 위한 다정한 충고를 들으며 그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은 상대를 구별된 존재로 봐주고, 기억하겠다는 뜻일 것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이 다시 온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안경 아저씨가 알려준 다정한 충고가 좋을지, 나만의 방법을 찾는 것이 더 좋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 안경 아저씨의 충고는 오답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