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상담사의 소진에 관하여
요즘 좀 슬럼프였다. 상담교사로 일한 지 꽤 되었지만, 이번 2학기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상담이 재미없다고 느꼈다. 학생들의 고민을 듣는 일이 어느 순간 비슷하게만 느껴졌다. 출근이 싫었고 상담실에 앉으면 ‘이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할까’ 하는 질문을 할 때가 있었다. ‘차라리 독립서점을 운영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지피티도 말리는 것을 보니, 주변에 말을 해도 말릴 것이 빤한 일이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 소진되었거나 권태로움에 빠져버린 나였다.
그동안 나는 상담에 도움이 될까 싶어 심리 관련 책들만 붙들고 있었다. 내 책장은 상담, 심리 관련 서적으로 빼곡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런 내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조금 내려놓아보기로 했다. 그렇게 소설을 읽었다. 나와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에 몰입하며 순수한 재미를 느꼈다. 성해나, 김금아, 김기태 등 국내 유명 작가들의 글을 읽어 나갔다. 글 속의 인물과 풍경들은 나를 다른 세계로 데려갔다. 그리고 공부가 싫어 수업시간에 소설을 읽곤 하던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바빠서 못 보던 영화도 봤다. <얼굴>을 보았는데, 등장인물의 심리를 파악하며 글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이 좋은 것인지 좋지 못한 것인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한 채로, 나는 좋은 영화라며 관련 리뷰를 쓰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뒤늦게 <F1>이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주연 배우 브래드 피트 얼굴이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그는 돈이나 명예와 관련 없이 트랙 위에서 최선을 다해 끝까지 달리고 있었다. 주름진 얼굴과 땀,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눈빛, 다음 세대를 위하는 마음, 왜곡된 비난이 쏟아질 때도 자신만의 길로 나아가는 모습 등 생각할 거리는 많았다.
그의 연기를 보고 있자니, 묘하게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다름이 아닌 상담임을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상담은 언제나 정답 없는 길 위를 달리는 일 같다. 학생, 부모, 처해진 상황마다 다른 길이 펼쳐진다. 나에게는 비슷한 고민 같은 것들이 개개인에게는 처음 맞는 시련과 고통이다.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기 위해 상담을 시작했다. 이제는 노년의 삶으로 넘어가는 브레드피트의 모습을 보며 역설적으로 처음의 마음이 다시 떠올랐다.
우리는 종종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힘을 얻는다. 심리 서적이 아니라 소설에서, 계획된 연수가 아니라 여행에서, 예상하지 못한 영화 속 한 장면에서 말이다.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은 거창한 회복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경험일지도 모르겠다. 멀리서 뒤돌아보면 이번 권태로움 또한 나를 돌아보게 한 시간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오늘 아침 출근을 했다. 학생들에게 평소보다 더 반갑게 안부를 건네본다. 나는 약하고 완벽하지 못해 때때로 흔들리겠지만, 결국 다시 나만의 길을 걸으며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갈 것이다.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들 곁에 있어주는 것, 그것은 명백히도 내게 가장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