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함에 닿고 싶어서
어제 위키드를 보고 왔습니다. 영화는 선악을 대비시키며 선한 사람으로 달라질 수 있는지에 대해 묻더군요. 저는 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나는 선한 사람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자문해 볼 때 스스로 선한 사람이라고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저는 선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했습니다. 제 스레드나 브런치를 보면서 혹자는 "정말 좋은 선생님이세요"하고 말해주고 어떤 이는 자기의 자녀도 선생님 같은 분께 상담을 받으면 좋겠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들으며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스스로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좋은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학교에 근무하다 보면 권태로움이나 고단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밀려드는 상담에 학생들의 고민은 각기 다르지만, 저에게는 비슷한 사례로 느껴질 때도 있거든요. 이러한 일들을 반복하다 보면 고단함과 권태로움을 동시에 느끼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럴 때면 스스로에게 이것밖에 안 되는 이기적인 놈이구나 하며 경멸의 시선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래도 조금 다행인 점은 처음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도 한다는 것입니다. 어쩔 줄 몰라하는 아이들의 곁을 지켜주기 위해 상담교사가 되었습니다. 어디서도 이해받지 못한 아이들은, 때로 나의 간절한 이해를 바라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내내 다정한 사람이 되어 아이들 곁을 지켜주겠노라 다시 다짐을 해봅니다. 비록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닐지라도, 그럭저럭 괜찮은 어른이 곁을 지켜주는 경험을 선물해주고 싶습니다.
작년 오랜만에 만난 지인은 제 말투가 다정해져서 토가 나올 것 같다(경상도식 표현)며 저를 놀렸습니다. 저는 그 말이 기분 좋았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많이 변했구나 하고요. 아이들 곁에 있다 보면 내가 선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지켜보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선한 사람이 되어보려고 몸부림치게 됩니다. 작은 행동, 말투 하나에도 신경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혹시나 조금은 선한 사람이 되어갈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은 내가 아이들을 위해 변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나를 변하게 만들었습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반짝이는 아이들 곁에 좀 더 머물기 위해서, 저는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려 계속 발버둥 쳐야겠습니다. 위키드 대사처럼 저는 조금씩 달리지고 있습니다. 아이들로 인해서, 또 아이들을 위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