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아버지의 엄마

by 교교

할머니가 위독하시다. 내겐 할머니가 많았었다. 아버지가 국민학생 시절, 자식이 없던 친척 대구 할머니에게 입양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지만, 예전에는 자식이 없는 친척에게 입양가는 것이 흔했다고 한다. 그렇게 아버지는 대구 할머니의 호적상 아들로 입양되며 의성에서 대구로 유학길에 올랐다.


아버지의 사연을 들어보면 마음이 먹먹해진다. 여느 날처럼 학교에 가려던 순간, 갑자기 영문도 모른채 대구행 버스에 올랐다고 한다. 그렇게 어른들의 선택에 어린 아버지의 삶은 바뀌었고, 그날 밤부터 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옥상에 올라가 하염없이 고향 방향 하늘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시작된 새로운 삶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두 할머니가 못된 악당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아버지도 나도 두 분 모두와 잘 지냈다. 명절이면 의성 할머니를 찾아뵙고, 돌아오면 대구 할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에게는 혼란스러운 일이었을지 몰라도, 어린 나에게는 왠지 든든한 일이었다. 내게는 의성 할머니, 대구 할머니, 외할머니까지 할머니가 세 분이 계셨으니 말이다. '기댈 구석이 많구나'하고 어린 나는 생각했다.

함께 살던 대구 할머니는 내가 스물넷에 돌아가셨고, 이제는 의성 할머니가 위독하시다. 요양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나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여기며 바쁜 일상 속 기억을 다시 묻어두었다. 그러나 죽음은 외면한다고 절대로 멀어지지 않는다. 점점 다가와 어느새 옆에 앉아 있다.


죽음은 인간을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주제인데 피할 수도 없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애써 모른 척하며 살아가려는지도 모른다. 가까운 이의 죽음, 나의 죽음이 언젠가는 찾아올 것임을 알면서도, 마치 죽지 않을 사람처럼 하루를 살아간다.


할머니와의 영원할 것 같던 순간들도 끝을 향해 가고 있다. 요즘은 결혼을 다들 미루다 보니 우리 집만 아이가 있어, 내 아홉 살배기 아들은 유일한 증손주다. 할머니는 건강이 악화되기 전, “증손주를 한 번 더 보고 싶다” 하셨다. 내일은 아들을 데리고 할머니를 찾아뵐 것이다.


팔십이 훌쩍 넘어 나의 아들을 업고 “임금님”이라 부르며 활짝 웃던 할머니의 모습을 나는 잊지 못한다. 가까운 이의 죽음이라는 불편한 순간 앞에서, 나는 멈추어서 다시 한번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한다. 정답은 없지만, 할머니가 내 아들에게 베푼 사랑처럼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어주겠노라 생각해 본다.


어린 아버지를 태운 버스가 향하는 길 위에는 세 사람의 눈물이 함께 흘러내렸다. 떠나는 아버지의 마음, 아이를 기다리는 할머니의 마음, 어린 아들을 보내야 했던 할머니의 마음. 그날의 아픔들과 불편함이 겹겹이 쌓여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