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근무하다 보면 학생들의 수많은 갈등을 목격하게 됩니다. 상담실을 찾는 학생들 역시 누군가와의 관계 문제로 찾아온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학생들이 자신의 고민을 믿고 털어놓는다는 점은 상담교사로서 큰 기쁨입니다.
다만 학생들이 갈등을 스스로 해결해 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인지 고민될 때가 있습니다. 최근 학교 현장에서는 또래관계에서 불편함이 생겼을 때, 갈등을 조율하거나 풀어보려는 시도 없이 곧장 학교폭력 신고로 이어지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학생들은 부정적인 감정을 상대방과 말로 풀어보기보다는 신고를 통해 상황을 정리하려는 방식이 꽤 익숙해진 듯 보입니다. 그 결과 서로 부딪히고, 어긋나고, 다시 말해보는 그 중간의 과정이 아이들에게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갈등을 견디고 조율하는 시간이 통째로 생략되는 것입니다.
이전 세대에도 갈등은 존재했습니다. 그 시절에는 갈등 발생시 도움을 요청하는 개념 자체가 희미해서, 더 거칠고 폭력적인 방식이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야만의 시대였고 청소년들을 보호해 줄 장치가 없었다는 면에서 그 시대가 좋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교사가 심지어 학교폭력의 가해자였던 시절이니까요. 하지만 그 시기 사소한 갈등들은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버텨야 하는 것이었고,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 애써야 하는 과제였습니다.
반면 지금의 청소년들은 굳이 갈등을 직접 해결하지 않아도 됩니다. 부모에게 말하거나, 교사에게 알리고, 학교폭력으로 신고하면 상대 학생과는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더 이상 상대 학생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고, 이후의 복잡한 절차는 어른들의 몫이 됩니다. 학생은 그저 결과에 따라서 때로는 분해하거나 만족해하면 됩니다. 이후에는 상대를 ‘없는 사람’처럼 대하며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또 다른 불편함이 생기면, 같은 방식이 다시 반복됩니다.
이쯤에서 학교폭력은 엄격히 다뤄져야 하는 거 아니냐고 질문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당연한 질문인데요. 과거 야만의 시대를 지나 온 어른들과 학부모들이 학교폭력 사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면도 이해가 됩니다. 다만 현재 학교에서 일어나는 학교폭력의 양상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도 물론 심각한 학교폭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전 세대가 기억하는 수준의 극단적인 폭력은 상당 부분 줄어든 것이 사실입니다. 최근 현장에서는 친했던 친구와의 갈등, 모르는 선후배 간 주고받는 시선, 남학생들 사이의 과한 장난 등이 학교폭력 신고로 이어지는 경우가 상당히 늘고 있습니다.
이러한 크고 작은 갈등들을 두고 지금의 학생들은 갈등 앞에 오래 머무르지 않습니다. 갈등을 겪고, 조율하고, 해결해 보는 경험을 충분히 배워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불편한 감정을 말로 풀어본 기억도,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며 기다려본 경험도 많지 않습니다. 대신 정답과 판정, 잘잘못을 가르는 과정에만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 결과 갈등은 조율해야 하는 과제가 아니라, 처리해야 할 사건이 됩니다.
사실 갈등은 무작정 참는 것도 아니고, 즉시 없애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조율하고, 말해보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현재 학생들의 관계는 종종 칼로 자르듯 명확한 선 긋기를 원하고 요구받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 옳고 그름만 남고 그 사이 회색지대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학교폭력 제도는 분명 학생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나 갈등을 신고로만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가, 아이들이 관계를 배우는 데 도움이 되는지는 여전히 고민이 필요합니다. 갈등을 제거해 주는 경험이 반복될수록, 갈등을 견디는 힘은 자라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주고 싶은 것이 갈등을 대신 처리해 주는 어른의 개입일지, 아니면 갈등 한가운데서 생각하고 말해볼 수 있는 시간과 경험일지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학교는 갈등이 사라지는 공간이 아니라, 갈등을 안전하게 배울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