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도망일지

내가 갈 수 있었던 가장 먼 곳

by 김지은이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쉐어하우스 호스트의 목소리는 친절하고 상냥했다. 우리가 이미 알던 사이인 듯 착각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입주 안내를 받고 전화를 끊고 나자 나는 볕 좋고 한적한 길을 느긋하게 걸으며 설레는 여행을 계획중인 사람이 되었다. 집 계약연장을 하지 못했고 곧 거처없는 사람이 된다는 사실은 잠시 희미해졌다. 어쩌면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생애 첫 비행시간은 꿈 같았다. 공항버스를 타고, 게이트 번호를 찾아 분주히 걸어 다니고, 티켓과 신분증을 내밀고, 마침내 비행기 안에 들어서서 자리에 앉기까지. 이륙하는 과정을 눈이 시리도록 집중해서 바라보고, 구름에 가장 가까이 닿기까지. 모든 순간이 초단위로 기억날 것 같은 시간이었다.


그 친절했던 호스트는 내가 비행기에서 내려 나갈 길을 찾고 있을 때 갑작스레 공항으로 마중 나오겠다던 말을 바꾸었다. 전화 너머 급한 일이 생겼다는 목소리가 어쩔 줄 모르는 듯 들렸고 나는 그럴 수도 있죠 괜찮아요 상투적인 답변을 돌려주었다. 캐리어 하나 없이 백팩과 에코백을 터질듯이 채워 메고 있던 어깨가 점점 땅으로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하늘을 날고 있었는데. 거기에선 그간의 모든 고민거리들이 작아지고 멀어진 듯한 느낌에 벅차 울먹거렸는데. 공항의 통창 너머로는 정차한 비행기와 함께 어느새 시작된 밤이 보였다. 이제 그만 환상에서 내려와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수많은 불빛과 사람들이 있던 공항에서 출발한 나는 점점 신경이 곤두서고 있었다. 택시가 달리는 길이 점점 칠흑같은 어둠으로만 채워지고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아직 영업 중인 마트 앞에서 내린 후 빠르게 멀어지는 택시를 바라보았다. 문득 오늘 낮에 동생이 보내왔던 신문기사 제목이 생각났다.


[제주 성당 묻지마 살인사건]


얘는 잘 지내라는 인사 한 번 이상하게 하네. 어쩌면 제주행을 다시 생각해보라는 메세지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마음으로 최근 몇 주를 보냈던 나는 그 무섭고 아픈 기사를 무덤덤하게 읽고는 기다리던 버스를 탔었다. 고작 몇 시간 전 일이었다. 막상 까만 밤 낯선 길 위에서 그 기사를 다시 떠올리니 두려운 마음이 일었다. 만약 뒤에서 누군가 따라오고 있다면 도망칠 수 있을까? 가방을 최대한 몸에 바짝 붙여 고쳐 매고는 발걸음을 어설프게 재촉했다.


쉐어하우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내가 택배로 미리 보내둔 짐들이 현관을 차지하고 있었다. 집안은 전체적으로 미색과 우드톤이 어우러진 따뜻한 공간이었다. 아무도 없었지만 거실을 밝히고 있는 장스탠드의 연한 오렌지색 불빛이 호스트를 대신해 나를 반겨주었다. 카펫 위로는 누군가 그림을 그리다 일어난 듯 펼쳐진 스케치북과 색연필들이 적당히 어지럽게 널부러져 있었다. 짐을 내려놓고 홀가분해진 몸으로 잠시 앉아 있자니 얼굴을 보기도 전에 신뢰감이 떨어졌던 호스트에 대한 뾰족한 감정도 누그러지는 듯했다.


호스트에게 잘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내두고 내가 예약했던 방에서 박스를 풀기 시작했다. 책들이 그렇게나 큰 짐이 된다는 것을 이사를 준비하며 확실히 느꼈다. 중고서점에 10만원 정도를 받고 내다 팔고, 받아주지 않는 책들을 끈으로 묶어 집앞에 내놓고도 차마 포기하지 못했던 책들이 박스에 하나 가득 있었다. 책꽂이는 따로 없는 방이어서 벽에 기대어 주욱 세워두고 있는데 문이 살짝 열렸다. “지은씨~” 나지막하고 조심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호스트는 자그마한 체구의 중년 여성이었는데 비니를 쓰고 맨투맨 티에 청바지, 패딩조끼를 입고 있어 나이보다 훨씬 어려보였다. 반짝이는 눈빛으로 잠시간 나를 쳐다보던 호스트는 “한 번 안아줘도 돼요?” 묻고는 팔을 벌리고 다가왔다. 내 등을 토닥이며 인삿말을 건네는 호스트에게 나는 순식간에 무장해제되었다.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렸지만 사실은 가슴 속에 가득 들어차는 뭉근한 온기를 느꼈다. 나를 반겨주는 곳을 간절히 원했던 마음을 스스로에게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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