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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NA Aug 08. 2021

툴라의 죽음

감정소품집


나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 아니 나는 여자를 증오한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여자를 믿지 않는 까닭은 다만 툴라가 여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랜만에 찾아온 평온 속에서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고 있었다. 테이블의 위치를 바꾸고, 테이블보의 주름을 이렇게 저렇게 헝클어보며 색의 배열을 정리했다. 작업은 순조로웠고 나는 약간의 행복을 느꼈다. 모델을 고용할 돈은 없었지만, 어젯밤 바에서 만난 여자 하나가 모델이 되어주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얼굴은 그럭저럭 평범했으나 다양한 표정이 흥미로운 여자였다. 나는 그 여자를 그리고 싶었다. 무엇보다 멍청한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아무 생각 없는 텅 빈 그릇 같은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절로 마음이 편해질 지경이었다. 언제나 나를 괴롭게 만들던 툴라의 날카로운 눈초리와 정반대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나는 툴라가 괴롭다. 툴라는 해질녘의 그림자처럼 때가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내 뒤꽁무니를 따라다닌다. 한때는 나도 툴라를 사랑한 적이 있다. 아니 지금도 나는 툴라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제는 툴라를 향한 증오가 너무나 커져 걷잡을 수 없다. 나는 툴라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것을 후회한다. 돌이킬 수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툴라를 모르던 때로, 툴라에게 사랑을 고백하기 전으로. 툴라는 발걸음을 죽이고 다가와 악마처럼 속삭인다. 툴라는 악의 기원. 툴라는 악의 기원. 툴라는 비극의 기원. 툴라는 괴물이다. 툴라는 내게 속삭인다. 귓볼이 녹아내리듯 달콤하게 속삭인다. 나는 툴라를 죽이고 싶다. 툴라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으면서 매일 밤 나를 찾아와 속삭인다. 


 다른 모델들은 시시하다. 툴라는 숲 속의 흡혈귀처럼 내 정신을 빨아먹는다. 터덜터덜 숲 속을 거닐던 나는 툴라에게 목을 물렸다. 나는 목과 심장을 툴라에게 내주었다. 가장 붉고 신선한 피를 툴라에게 내주었다. 그런데 툴라는 이제 내가 더럽다고 욕한다. 매일 밤 나체의 툴라가 나를 덮친다. 툴라는 발가벗고 있지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수치로 옷깃을 여미는 것은 오히려 내 쪽이다. 아버지가 내 손목을 거칠게 잡아끌어 강제로 무릎을 꿇리고 내 이마에 손을 얹었을 때. 보이지도 않는 신께 나의 죄를 사하여달라고 구걸해야만 했을 때도 나는 부끄럽지 않았다. 나는 툴라의 민낯이. 툴라의 겨드랑이가. 야생의 툴라가. 툴라의 나체가 부끄럽다. 나는 툴라를 사랑하지 않고 다만 툴라를 탐한다. 어젯밤 바에서 나는 큰소리로 툴라를 욕했다. 툴라같은 년은 죽어도 싸다고. 아니 툴라같은 년은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 죽어 마땅하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도 마땅치 않다고. 나는 목이 쉬도록 툴라를 욕하며 위스키를 들이마셨다. 


 툴라를 죽이고 싶다. 툴라의 목을 조르고 싶다. 걱정 없이 통통하게 오른 툴라의 볼살을 볼 때 나는 살기를 느낀다. 거울 속에서 툴라는 행복하다. 툴라는 완전하다. 툴라는 나 말고도 남자가 많다. 툴라는 이 남자 저 남자 아니 이 여자 저 여자. 모든 인간의 침대를 기웃거린다. 툴라는 숲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흡혈귀다. 툴라는 언제 어디서나 잠복 태세를 갖추고 우리의 심장을 겨냥한다. 툴라를 처음 만났을 때 툴라는 오직 나뿐이라고 고백했다. 길거리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오직 나만 존재하는 것처럼 운명을 느꼈다고 말했다. 툴라는 황홀한 잠자리를 선물하는 대신 나의 내일을, 나의 영원을 앗아간다. 툴라와 뒤엉켜 툴라가 내뱉는 뜨거운 입김을 들이마실 때 나는 오늘의 고통을 잊는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찾아오는 어김없는 두통. 툴라가 죽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툴라가 나의 마음을 이해한 듯 나를 죽이러 찾아왔다. 바꾼 테이블의 위치를 멀리서 바라보며 나와 사물의 거리를, 나와 내 마음의 거리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 툴라가 벨을 눌렀다. 툴라는 아무렇지 않게 내 앞으로 걸어와 천천히 옷을 벗었다. 발가벗은 몸과 함께 기다란 소매 폭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권총이 드러났다. 툴라는 이제 내가 필요 없다고 말했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노라 고백했다. 죽어도 여한은 없다고 대답했다. 아니 고맙다고 말했다. 툴라는 결국 내게 영원을 선물했다. 툴라는 내게 영원을 약속하고 영원을 빼앗아가고, 영원을 선물했다. 


 나는 툴라에게 한때는 너를 사랑했노라고 말했다. 툴라는 어젯밤 만난 바의 여자처럼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툴라는 나를 찾아올 때마다 부러 얼굴을 집에 두고 온 지 오래라고 말했다. 과연 가만히 툴라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보니 얼굴이 없었다. 툴라만 나의 심장을 앗아간 것이 아니었다. 툴라는 내게 올 때 생명을 잃었다. 툴라는 내 것이 될 수 없었다. 아니 하지만 나는 맹세컨대 툴라를 가지려 한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툴라를 아껴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나는 사랑하는 법을 몰랐다. 툴라는 이제 나를 떠나가는 대신 나를 처벌하기를 택했다. 


 애당초 툴라는 나를 죽이기 위해 찾아왔던 걸까? 죽어가는 내게 오직 그 의심만이 선명해진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 툴라는 너무 무섭다. 툴라는 악마다. 툴라는 괴물. 툴라는 내 심장을 앗아가고 그 자리에 죽음의 씨앗을 심었던 것이다. 툴라는 어째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 그런데도 왜 툴라는 매일 밤 나를 찾아왔던 것일까. 나를 죽이기 위해서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툴라의 소원대로 나는 죽어간다. 그러나 툴라는 나의 죽음을 소망한 적조차 없었겠지. 툴라의 치밀함에 박수를 보낸다. 완벽한 밀실 사건. 그러나 툴라여, 이제는 정말로 네게 안녕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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