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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게매니아 Dec 13. 2016

잔을 떨어뜨렸다

밤에 하는 설거지에는 묘한 쾌감이 있다. 하루 일정을 마무리 하고 맥주 한 잔을 한다. 그 다음 맥주잔을 포함한 설거지는, 하루를 완벽히 마무리한다는 의미가 있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그 날도 여느 때처럼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물론 두 캔의 하이볼을 끝장낸 채였다. 술기운이 살살 올라올 무렵 하이볼을 담았던 잔을 씻고 있는데-쾅.


잔을 떨어뜨렸다.


다행히도 잔은 괜찮았다. 통유리로 만들어진 썩 괜찮은 잔이었다. 그렇게 안도하고 잔을 씻어냈다. 잔을 건조대에 올린 뒤 잔 밑에 깔려있던 그릇을 집어들었다. 그릇은 정확히 두 동강이 나 있었다.


설거지를 하다 실수한 적이 없다. 설거지는 언제나 신속 정확하게 끝장내야하기에. 설거지에 대한 나의 사랑은 유별나다. 얼큰하게 취기가 올라 집에 도착해서도, 나는 언제나 설거지를 해댔다. 물론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어떤 실수도 없이, 완벽하게 설거지를 마무리하고 침대에 눕는게 나의 몇 개 없는 낙 중 하나였다. 그런데, 오늘은 그릇을 깨뜨린 것이다.


문득 지난 몇 주간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아니, 지난 한 해가 머릿속을 때렸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꼬인 지난 1년이었다. 친척과의 관계를 끊었고, 몇 가지 일을 덮어야만 했다. 그 와중에 친했던 이와 등을 돌렸고, 가장 아끼던 집단을 등졌다. 남들에겐 몇 해에 걸쳐 일어나야만 했던 일이, 1년만에 나에게 다가온 셈이다. 누구의 말대로 하느님이 있다면, 그래서 나와 마주한다면 한 번쯤 묻고는 싶었다. “하느님,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시는 건데요?” 그러면 하느님은 이렇게 대답하시겠지. “허허 녀석아. 아프니까 청춘인것이다”. 개뿔.


평생 실수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만 잘하면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라 생각했다. 남들 신경 쓰지 않고, 내 갈 길만 가면 완벽하게 나의 삶을 살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세상은 나만 잘났다고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사건들. 그 속에서 무언가는 강하게 뒤엉켰고, 뒤엉킨 사건들 사이에서 난 언제나 끼어있었던 존재였다. 그렇게, 결코 길지는 않은. 그러면서도 한없이 길었던 시간을 견뎌왔다.


생각해보면 이랬던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몇 년 전이었다. 술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설거지를 하다 그릇을 놓쳤다. 그릇은 두 동강이 난 채 싱크대를 튕겨 올라왔다. 동시에 내 살갗을 깊숙이 파고 들었다. 채 마를 틈이 없었던 물과 함께, 피가 온 싱크대를 적셔 나갔다.


끔찍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내 실수로 비롯된 일이다. 내가 조금 더 악력이 좋았다면, 그래서 미끌거리는 그릇을 더 꽉 잡을 수 있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싱크대에 고인 이 핏덩이들은 그네들의 잘못이 아닌 나의 잘못이다. 이런 자세로 몇 년을 살아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슨 병에 걸려도 그건 온전히 내 탓이었다.

 

남들은 신기해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자책하면서도 어떻게 그렇게나 빨리 일어날 수 있냐고. 한 때는 그 것이 자랑인 적도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리젠이 조금 더 빨라! 누가 나한테 스팀팩을 놓아주는 것만 같아! 그 것이 차곡차곡 쌓여 하나의 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안 건, 그 이후로 몇 년이 지나서였다.


스스로에게 더 큰 잣대를 들이댄다. 너는 실수하면 안돼. 실수하면 니가 온전히 다 감당할거니까. 니 인생 조금 더 잘 풀리게 하려면, 너는 니가 하는 일을 열심히 해야돼. 그럼 다 잘풀릴거야.그렇게 이제까지 살아왔다. 그러나 세상은, 잔을 떨어뜨려도 잔이 아닌 다른 그릇이 깨어지는것과 같은 불확실성의 연속이었다.


설거지를 마친 뒤, 나는 깨진 그릇을 당장 밖으로 가져다 놓았다. 부끄러웠을수도, 실수에서 벗어나고 싶었을수도 있다. 이렇든 저렇든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나는 아직, 실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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