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끓던 스무 살, 내 운명은 골목길에서 시작되었다

1화

by 홀로서기

피 끓던 스무 살, 내 운명은 골목길에서 시작되었다

1996년 2월. 거리에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은퇴 소식이 흘러나오고, 내 허리춤에는 삐삐가 달려 있던 시절이었다. 나는 스무 살이었다. 세상 무서울 것 없고, 내가 마음만 먹으면 뭐든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꽉 차 있던 나이.

지방대 연극영화과 합격 통지서를 받아 들고 서울을 떠나기 바로 전날 밤이었다. 친구 녀석들은 나를 환송해 준다며 술판을 벌였고, 우리는 언제나처럼 대학로를 쏘다니며 젊음을 과시했다.


"야, 광주 가서도 기죽지 말고 너답게 놀아라!"


친구들의 덕담 아닌 덕담을 들으며 노래방으로 향하던 새벽길. 운명은 예고도 없이, 아주 촌스러운 방식으로 찾아왔다. 어두운 골목 어귀에서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곤경에 처한 여자 두 명. 지금 생각해보면 참 흔한 클리셰 같은 상황이었지만, 당시 혈기 왕성했던 우리에게 그건 '영웅 놀이'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도와줄까?"


그 한마디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 줄은 그때는 몰랐다. 우리는 6명이었고, 상대는 고작 두 명이었다. 객기로 덤벼든 싸움은 싱겁게 끝났다. 상황이 정리되고 고개를 든 여자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긴 생머리에 하얀 얼굴. 내 이상형이었다. 나는 짐짓 어른인 척, 최대한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이 동네 양아치 많으니까 조심해서 가세요."


그렇게 돌아서려는데 그녀가 우리를 붙잡았다. 택시 타는 큰길까지만 같이 가달라고. 속으론 쾌재를 불렀다. 조금이라도 더 그녀 옆에 있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그 설렘은 택시 승강장 앞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아까 도망갔던 녀석들이 동네 깡패들을 모조리 불러 모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튀어!"


아비규환 속에서 나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리고 달렸다. 내 등 뒤에 숨을 헐떡이며 따라오는 그녀가 다칠까 봐, 나는 막다른 골목길 입구를 내 몸으로 막아섰다.


"내 친구들 올 때까지 버티는 게 내 목적이다."


10대 1의 싸움. 날아오는 주먹과 발길질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그때 허벅지에서 느껴진 뜨거운 통증. 공업용 커터 칼이 내 허벅지를 뚫고 들어왔다. 바지가 피로 젖어가는 와중에도 나는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내가 무너지면 그녀가 다칠 테니까.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마지막으로 본 건, 엉엉 울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었다. 그것이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고, 내 옆에는 엎드려 잠든 그녀가 있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그 병원의 간호사였고, 나보다 무려 열 살이나 많은 서른 살이었다.

20살 대학 신입생과 30살 간호사.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았던 우리의 평행선은, 그날의 핏빛 혈투 덕분에 기적처럼 교차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