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하얀 천장, 그리고 백의의 천사

by 홀로서기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건 코끝을 찌르는 알싸한 소독약 냄새였다. 낯선 천장. 뚝뚝 떨어지는 링거 수액. 그리고 욱신거리는 허벅지의 통증. 아, 나 살아있구나.


"으음..."


몸을 뒤척이자 침대 맡에 엎드려 있던 누군가가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긴 생머리에 하얀 얼굴. 어젯밤 내가 목숨 걸고 지키려 했던, 바로 그 여자였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몽롱한 정신 때문이었을까. 그녀의 모습이 마치 천사처럼 보였다면, 스무 살의 치기 어린 과장이려나.


"정신이 들어요?"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걱정과 안도가 뒤섞인 그 눈빛을 마주하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어젯밤 10대 1로 싸울 때보다 더 심하게 요동쳤다.


"여기는... 병원인가요?"

"네, 제가 일하는 병원이에요. 호준 씨가 기절해서... 많이 놀랐어요."


그제야 상황이 파악됐다. 친구 녀석들은 보호자 대기실 의자에 널브러져 자고 있었고, 그녀는 밤새 내 곁을 지킨 모양이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이 종합병원의 간호사였다. 어쩐지, 피를 보고도 침착하게 대처한다 싶었다.


"다행이에요. 뼈에는 이상 없고, 근육만 좀 놀랐대요. 꿰맨 상처만 잘 아물면 된대요."


그녀가 내 이마에 손을 얹으며 열을 체크했다. 서늘하고 부드러운 손길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 여자, 예쁘다. 다시 봐도 예쁘다. 내 이상형이다. 하지만 동시에 현실적인 거리감이 느껴졌다. 나는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풋내기 대학생인데, 그녀는 어엿한 사회인, 그것도 간호사라니.

그때였다. 병실 문이 쾅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이호준! 너 이 새끼!"


어머니였다. 그리고 그 뒤엔 묵묵한 표정의 아버지. 아, 올 것이 왔구나. 내일 광주로 내려가야 할 아들이 병원에 누워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우리 '김 여사님'의 폭주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엄마, 아 그게 아니라..."

"뭐가 아니야! 멀쩡히 학교 간다는 놈이 싸움박질? 너 미쳤어?"


어머니의 등짝 스매싱이 날아오려는 찰나, 그녀가 벌떡 일어나 내 앞을 막아섰다.


"어머님! 호준 씨 혼내지 마세요. 저 구하려다 다친 거예요."


어머니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녀는 차분하고 예의 바르게 어젯밤의 상황을 설명했다. 깡패들에게서 여자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진 아들의 무용담. 어머니의 표정이 순식간에 분노에서 기특함으로, 그리고 다시 안쓰러움으로 변해갔다.


"어머... 그랬구나. 세상에, 우리 아들이..."


어머니는 금세 태도를 바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가씨가 정아라고 했나? 고마워요. 우리 못난 아들 곁을 지켜줘서. 병원비는 우리가..."

"아니에요, 어머님. 병원비는 제가 이미 처리했어요. 제 생명의 은인인데요. 당연한 도리죠."


그녀, 정아 누나는 싹싹하고 야무졌다. 어머니는 며느리감이라도 본 듯 흐뭇해하셨고, 아버지는 묵묵히 내 어깨를 두드리며 "사내놈이 그 정도 상처는 훈장이다"라고 짧게 말씀하셨다.

다음 날, 퇴원 수속을 밟고 병원 앞 공터. 부모님이 차를 가지러 간 사이, 나는 정아 누나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기... 누나."

"응?"

"실밥 풀려면 일주일 걸린대요. 그래서 광주 내려가는 거 미뤘어요."

"그래? 잘됐네. 그럼 실밥 풀러 올 때 연락해.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누나가 수줍게 웃으며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명함이었다. [00병원 간호사 김정아]


"그리고 이거, 내 번호야."


그녀가 내 손바닥에 볼펜으로 숫자를 적어주었다. 011-234-4404 핸드폰 번호였다. 1996년, 핸드폰은 부의 상징이자 '어른'의 전유물이었다. 011 번호를 가진 여자라니. 다시 한번 나와 그녀 사이의 벽이 느껴졌지만, 나는 용기를 냈다.


"제 번호는요... 삐삐인데요. 015-238-1404예요."

"알았어. 꼭 연락할게, 호준아."

'호준아'.


그녀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2월의 찬 바람이 봄바람처럼 느껴졌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일주일. 실밥을 푸는 그날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이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매일 삐삐를 쳐다보며 그녀의 연락을 기다릴 것이다.

차에 타자 아버지가 룸미러로 나를 보며 툭 던지셨다.


"제비 새끼인 줄 알았다."

"아, 아버지!"

"연상이다. 쉽지 않을 거야. 마음 단단히 먹어라."


아버지의 그 말은 경고였을까, 아니면 응원이었을까. 어쨌든 나는 지금, 인생에서 가장 길고도 설레는 일주일을 앞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