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을 때, 코끝을 간지럽히는 냄새는 낯선 향수 냄새가 아니었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구수한 김치찌개 냄새였다. 비몽사몽간에 몸을 일으키려다,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하나에 비명처럼 이불을 뒤집어썼다.
'으악! 내 머리!'
내 머리카락은 저주받은 악성 곱슬이다. 평소엔 젤과 스프레이로 떡칠을 해서 가라앉히지만, 자고 일어나면 영락없는 베토벤, 아니 폭탄 맞은 사자 꼴이 된다. 사귄 지 2일 차. 이 꼴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나는 이불 속에서 더듬거려 바닥에 굴러다니던 야구 모자를 찾아 푹 눌러썼다.
"일어났어?"
그녀가 쟁반에 아침상을 차려 들고 들어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돼지고기 김치찌개. 자취생에게는 상상도 못 할 진수성찬이었다.
"모자는 왜? 실내에서."
"아, 그냥... 머리가 좀..."
"베토벤 머리 때문에 그래?"
그녀가 킬킬대며 웃었다.
"아까 자는 거 다 봤어. 귀엽던데 뭘."
이미 다 들켰구나. 나는 체념하고 숟가락을 들었다. 한 입 먹는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우리 엄마보다 요리를 더 잘한다. 이 여자, 도대체 못 하는 게 뭘까.
밥을 먹고 우리는 학교로 향했다. 오전 10시의 캠퍼스는 활기가 넘쳤다. 나는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걸었다. 내 옆에는 누가 봐도 눈이 돌아갈 만큼 예쁜, 소위 '서울 여자' 스타일의 그녀가 팔짱을 끼고 있었으니까.
"여기가 연습실이야."
연극영화과 연습실 문을 열자, 시커먼 동기 놈들의 육두문자가 가장 먼저 반겨주었다.
"야 이 새끼야! 연습 늦었... 헉."
내 뒤따라 들어오는 그녀를 보자마자, 욕을 하던 입들이 합창이라도 하듯 턱 다물어졌다. 순식간에 정적이 흘렀다. 꾀죄죄한 트레이닝복 차림의 동기들 사이에서, 깔끔한 재킷에 청바지를 입은 그녀는 그야말로 '여신'처럼 빛났다.
"누구... 세요?"
동기 미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안녕하세요. 호준이 여자친구 김정아입니다."
그녀의 당당한 소개에 연습실이 뒤집어졌다.
"와, 진짜요?"
"호준이 네가?"
"누나 아니세요?"
쏟아지는 질문 공세에 그녀는 여유롭게 웃으며 대처했다. 심지어 나이 차이를 묻는 말엔
"호준이랑 친구 먹기로 했어요"
라며 능구렁이처럼 넘어갔다. 서른 살의 연륜이란 이런 것인가. 그녀는
"오늘 하루만 호준이 좀 빌려 갈게요"
라는 멘트와 함께, 동기들의 환호를 받으며 나를 데리고 나왔다. 어깨가 으쓱했다.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다. 하지만 그 자존심은 학교 정문을 나서자마자 시험대에 올랐다.
"들어가자."
그녀가 나를 이끈 곳은 다름 아닌 '이동통신 대리점'이었다.
"여긴 왜?"
"너 핸드폰 하나 하자."
"뭐? 야, 나 돈 없어. 대학생이 무슨 핸드폰이야."
1996년, 핸드폰은 '벽돌'에서 막 벗어난 고가의 사치품이었다. 삐삐면 충분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단호했다.
"내가 해줄게. 기계값이며 가입비, 내가 낼 테니까 너는 들고만 다녀."
"싫어. 내가 무슨 제비냐? 여자한테 그런 걸 받게."
내 목소리가 높아졌다. 나이 차이도 신경 쓰이는데, 경제력까지 기대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내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녀가 한숨을 쉬더니, 내 손을 꽉 잡았다.
"호준아, 자존심 세우지 마. 나 답답해서 그래."
"......"
"너는 광주에 있고 나는 서울에 있잖아. 보고 싶어도 못 보고, 목소리 듣고 싶어도 공중전화 찾아야 하고... 나 너랑 연락 안 되면 불안해서 일도 못 해. 제발, 나 좀 살려주는 셈 치고 하자. 응?"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불안하다'는 그 말. 어제 빗속에서 떨며 나를 기다리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결국 나는 백기를 들었다.
"알았어... 대신!"
"대신?"
"통화료랑 기본료는 내가 알바를 해서라도 낼 거야. 그것까지 양보 못 해."
그녀가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잠시 후, 내 손에는 묵직한 모토로라 플립형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011-xxxx-xxxx. 나에게도 011 번호가 생겼다.
"이제 삐삐 치고 하염없이 안 기다려도 되겠다."
좋아하는 그녀를 보니, 묘한 감정이 들었다. 이 작은 기계가 서울과 광주의 300km 거리를 0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아니, 적어도 그녀가 내 목소리가 그리울 때 언제든 찾을 수 있는 '주머니 속의 남자'는 되어줄 수 있겠지.
"자, 이제 숙제 끝냈으니까 놀러 가자!"
"어디로?"
"놀이공원! 나 교복 입은 기분으로 놀고 싶어!"
그녀가 내 새 핸드폰을 자기 핸드백에 쏙 집어넣으며 내 팔을 끌었다. 철없는 스무 살보다 더 아이처럼 들뜬 서른 살의 그녀. 나는 못 이기는 척 그녀의 손에 이끌려 택시에 탔다. 행선지는 광주 패밀리랜드. 우리의 진짜 데이트는 이제부터였다.
작가후기~~~~~~
네! 현생에 힘들어서 이제야 올립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