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미널을 빠져나오자 차가운 밤공기가 훅 끼쳐왔다. 택시를 탈까 했지만, 둘 다 비에 쫄딱 젖은 생쥐 꼴이라 좁은 차 안에 앉는 게 왠지 더 어색할 것 같았다.
"누나, 걸을까? 내 자취방 여기서 멀지 않아."
"응, 걷자. 비도 좀 잦아들었네."
우리는 젖은 어깨를 맞대고 걷기 시작했다. 3월이라고는 하지만 비 내리는 밤거리는 겨울처럼 추웠다. 옆에서 걷는 그녀의 몸이 오들오들 떨리는 게 느껴졌다. 서울에서 급하게 내려오느라 얇은 트렌치코트 하나만 걸친 상태였다.
"잠깐만."
나는 걸음을 멈추고 입고 있던 점퍼를 벗었다.
"너 춥잖아. 안 그래도 되는데..."
"나는 열이 많아서 괜찮아. 빨리 입어."
나는 젖은 그녀의 어깨 위에 내 점퍼를 걸쳐주고 지퍼까지 꼼꼼하게 올려주었다. 내 옷이 그녀에게는 품이 넉넉해서 마치 아이가 어른 옷을 입은 것 같았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따뜻하다..."
그녀가 내 옷깃을 여미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망설이던 그녀가 내 팔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호준아, 좀 붙어서 가자. 추우니까."
그녀가 내 팔짱을 꽉 꼈다. 닿은 팔뚝을 통해 그녀의 체온과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추위 때문인지, 설렘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지지대라도 된 것처럼 꼭 붙어서 걸었다. 쌍촌동 자취방으로 가는 그 길은 어두컴컴하고 질퍽거렸지만, 내 생애 가장 황홀한 산책길이었다.
문제는 도착한 뒤였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내 머릿속에 비상벨이 울렸다. '아! 청소!' 남자 혼자 사는 자취방의 적나라한 풍경. 바닥에 굴러다니는 양말 한 짝, 책상 위에 쌓인 컵라면 용기... 나는 다급하게 문 앞을 막아섰다.
"누나! 자, 잠깐만! 밖에서 1분만 기다려!"
"비켜봐. 다 젖어서 추워 죽겠구만 뭘 가려."
그녀는 내 팔을 가볍게 밀치고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방 꼴을 본 그녀가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어휴, 남자 혼자 사는 티를 이렇게 내니?"
나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으로 주섬주섬 옷가지를 치웠다. 그녀는 내 등을 팡팡 두드리며 웃었다.
"일단 씻기나 해. 감기 걸리겠다."
그녀가 먼저 씻는 동안 나는 우산을 쓰고 근처 마트로 달려갔다. 그녀가 적어준 메모지에는 오징어, 밀가루, 돼지고기, 그리고 소주가 적혀 있었다. '술이라...' 빗속을 뛰면서도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오늘 밤, 우리는 진짜 어른의 대화를 나누게 될 것이다.
장을 보고 돌아오니 믿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내 헐렁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젖은 머리를 털며 요리를 하고 있는 그녀. 좁은 자취방에 퍼지는 보글거리는 김치찌개 냄새. 그 모습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 현관에서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왔어? 간 좀 봐볼래?"
그녀가 내민 숟가락 끝에는 빨간 국물이 담겨 있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칼칼하고 뜨끈한 맛. 빗속을 뚫고 달려온 그녀의 마음 같은 맛이었다.
우리는 낡은 자취방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마주 앉았다. 화려한 레스토랑의 스테이크보다, 비싼 와인보다 더 완벽한 첫 데이트 코스였다. 소주잔을 채우며 그녀가 물었다.
"호준아. 내가 나이가 많아서... 여기까지 오면서도 많이 고민했어."
나는 잔을 비우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누나. 나이는 상관없어. 지금 누나가 내 앞에 있다는 게 중요하지."
그날 밤, 창밖의 빗소리는 배경음악이 되었고, 우리는 이 좁은 방에서 서로의 온도를 확인하며 밤을 지새웠다.
작가 후기 입니다.
오늘 현생으로 겨우 시간을 맞췄습니다....ㅎㅎ
고등학생들 축제....진행좀 하고 왔거든요...ㅎㅎ
내일도 현생........ㅋㅋㅋㅋ최대한 올리겠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