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기도 전에 내게 닥친 건 '이별 아닌 이별'이었다. 서울에서 광주까지는 고속버스로 4시간. KTX도 없던 1996년에 그 거리는 생이별이나 다름없었다.
"호준아, 밥은 잘 먹고 있지? 아픈 데는 없고?"
"응, 누나. 여기 선배들이 빡세서 정신이 하나도 없어."
매일 밤, 기숙사 앞 공중전화 부스는 전쟁터였다. 타지에서 온 신입생들이 고향에 있는 애인이나 부모님께 전화를 걸기 위해 줄을 길게 늘어섰기 때문이다. 내 차례가 오면 나는 주머니 가득 바꿔온 100원짜리 동전을 전화기 위에 탑처럼 쌓아놓았다.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 짤그랑. 그 소리가 야속하게 들릴 만큼 시간은 빨리 흘렀고,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의 따가운 눈초리에 "사랑해"라는 말도 속삭이듯 급하게 해야 했다.
보고 싶었다. 8층까지 업고 올라갔던 그 날의 온기가 아직 등 뒤에 남아있는 것 같은데, 현실의 나는 낯선 도시의 좁은 기숙사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봐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학과 행사와 신입생 환영회로 정신없이 며칠을 보내느라, 정해진 시간에 누나에게 전화를 걸지 못했다. 삐삐가 몇 번 울렸지만, 선배들의 눈치 때문에 확인할 수 없었다. '화났겠지? 실망했으려나?' 죄책감과 피곤함에 절어 터덜터덜 기숙사로 돌아온 늦은 밤. 허리춤의 삐삐가 미친 듯이 울려 댔다.
02-xxx-xxxx (서울 지역번호가 아니었다) 062... (광주 지역번호였다)
그리고 음성 사서함에 남겨진 메시지.
"...호준아, 나야. 나 지금 광주 터미널이야. 너무 보고 싶어서 무작정 내려왔어. 비가 많이 오네..."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시계를 보니 밤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서울에서 광주까지, 그 먼 길을 퇴근하자마자 달려온 것이다. 나는 슬리퍼 바람으로 뛰쳐나갔다. 택시를 잡을 정신도 없었다. 아니, 택시비가 아까운 게 아니라 그냥 내 다리로 뛰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광주 종합버스터미널.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고 텅 빈 대합실 구석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서울 깍쟁이처럼 세련된 트렌치코트를 입은 그녀가, 촌스러운 터미널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누나!"
내 목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지쳐 보였던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호준아!"
그녀는 가방도 내팽개치고 내게 달려와 안겼다. 젖은 내 옷이 그녀의 코트를 적셨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꽉 끌어안았다.
"바보야... 연락도 안 되고...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그녀의 어깨가 들썩였다. 울고 있었다. 서른 살의 어른인 줄만 알았던 그녀가, 내 품에서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이 차이도, 물리적 거리도 중요하지 않다는 걸. 이 여자는 지금 내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그 모든 걸 뚫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미안해... 진짜 미안해, 누나."
나는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눈물 젖은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주변의 시선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는 자석에 이끌리듯 서로에게 다가갔다.
빗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리는 터미널 처마 밑. 우리의 첫 키스는 비 냄새와 짭짤한 눈물 맛이었다. 그것은 내가 난생처음 해보는 '어른의 사랑'의 맛이었다.
"가자. 배고프지? 맛있는 거 먹으러."
나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이. 그날 밤, 광주의 비는 그칠 줄 모르고 내렸지만, 내 마음속엔 뜨거운 해가 떠올랐다.
작가후기
네! 오늘도 무사히 한편 올립니다.
네. 제 이야기입니다. 경험담이죠.
오늘은 여기까지.....
'이미지는 ai를 통해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