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서른 살의 토끼, 스무 살의 호랑이

by 홀로서기

"패밀리랜드 가주세요!"


우리는 택시를 타고 광주의 유일한 놀이공원, 패밀리랜드로 향했다. 그녀는 교복을 입은 여고생처럼 들떠 있었다. 창밖을 보며 연신


"와, 넓다!"

"저거 봐!"


를 외치는 그녀를 보며 나도 웃고 있었지만, 사실 속으로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입장료가 얼마더라... 자유이용권 끊으면 점심은 뭘 먹지?'


아침에 핸드폰 대리점에서 큰소리친 것까진 좋았는데, 내 주머니 사정은 여전히 '대학생' 수준이었다.

매표소 앞에 섰다. 가격표를 보니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비상금을 탈탈 털어야 겨우 표를 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갑을 꺼내려는데, 그녀가 쑥 내 앞에 자신의 지갑을 내밀었다.


"호준아, 이거."

"어? 아니야, 내가 낼게."

"아니야, 받아봐. 안에 메모 있어."


의아해하며 지갑을 열었다. 지폐 사이로 꼬깃꼬깃 접힌 포스트잇이 보였다.


[호준아! 오늘은 내가 낼게! 대신 계산은 남자가 멋지게 해줘! 기죽지 말고!]


순간 울컥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 자존심을 지켜주려는 그 마음이 너무 예뻐서.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의 카드로 표를 끊었다.


"가자! 오빠가 모실게!"

"오빠는 무슨, 얼른 와!"


우리는 범퍼카부터 탔다. 운전대를 잡은 나는 장난기가 발동해 그녀의 차를 집요하게 들이받았다.


"야! 이호준! 너 거기 안 서?"


차에서 내린 뒤에도 우리는 술래잡기하듯 놀이공원을 뛰어다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웃어본 게 얼마 만인가 싶었다.

잠시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는데,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서른 살의 직장인. 항상 단정해야 했던 그녀가 오늘은 땀범벅이 되어 웃고 있었다. 문득 그녀에게 '진짜 10대'의 기분을 선물하고 싶어졌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나는 거짓말을 하고 기념품 가게로 뛰었다.


"아줌마, 이 토끼 머리띠 하나 주세요."


계산을 하려는데 점원 누나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자친구 주시게요? 근데 여자분 혼자 쓰면 좀 창피할 텐데... 남자가 같이 써주면 감동이 두 배죠."


그 말에 설득당해버렸다. 결국 나는 마지막 남은 비상금을 털어 내 몫의 '호랑이 머리띠'까지 샀다.


"자, 선물!"


내가 토끼 머리띠를 내밀자 그녀가 질색했다.


"야! 내 나이가 몇인데 이런 걸 해!"

"나이? 스무 개잖아. 오늘만큼은 열 살로 돌아가는 거야."


나는 내 머리에 호랑이 머리띠를 먼저 썼다.


"어흥! 나도 썼잖아. 얼른 써."


그녀는 못 이기는 척 토끼 머리띠를 썼다. 세상에. 내 눈에 콩깍지가 씌인 건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놀이공원에 있는 그 어떤 10대보다 귀여웠다.

서른 살의 토끼와 스무 살의 호랑이. 우리는 남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청룡열차(롤러코스터)에 몸을 실었다. 열차가 하강하기 직전, 안전바 아래로 그녀가 내 손을 꽉 잡았다.


"호준아, 나 무서워!"

"걱정 마. 내가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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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소리와 함께 열차가 곤두박질쳤다. 우리는 서로의 손이 으스러져라 꽉 잡은 채, 바람을 가르며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만큼은 나이 차이도, 서울과 광주라는 거리도, 현실의 무게도 모두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해가 저물고, 다시 현실로 돌아올 시간. 터미널 앞 국밥집에서 밥을 먹는 내내 우리는 말이 없었다. 헤어짐이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갈게. 도착하면 전화할게."


버스에 오르는 그녀의 뒷모습이 작아 보였다. 토끼 머리띠를 쓰고 아이처럼 웃던 그녀는 다시 어른의 옷을 입고 서울로 떠났다.

자취방으로 돌아온 밤. 책상 위에 그녀가 몰래 두고 간 봉투가 보였다. 편지와 함께 들어있는 지폐 몇 장.


[동기들한테 맛있는 거 사줘. 기죽지 말고! 사랑해.]


텅 빈 방 안에서 나는 한참이나 그 편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날 밤, 나는 다짐했다. 이 여자를 위해서라도, 나는 더 멋진 남자가 되어야겠다고.


작가 후기~~~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억??

하여튼 뭐 그렇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