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을 때, 창밖은 온통 파란색이었다. 어젯밤엔 칠흑 같았던 동해 바다가 아침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옆을 보니 그녀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살짝 벌어진 입. 그 무방비한 모습이 사랑스러워 한참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깨웠다.
"누나, 해 떴어. 바다 보러 가자."
우리는 대충 고양이 세수만 하고 모래사장으로 나갔다. 아직 차가운 5월의 바닷바람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지만, 맞잡은 손은 따뜻했다. 우리는 유치한 커플들이 하는 건 다 했다. 모래 위에 이름 쓰기, 나 잡아봐라, 파도 피하기... 스무 살과 서른 살이 아니라, 그냥 철없는 소년 소녀가 되어 꺄르르 웃으며 해변을 뛰어다녔다.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
강원도까지 왔으니 메뉴는 당연히 회였다. 대포항 근처 횟집에 자리를 잡았다. 싱싱한 모듬회 한 접시에 매운탕, 그리고 빠질 수 없는 낮술(소주) 한 잔. 운전은 돌아갈 때 생각하기로 하고, 우리는 기분 좋게 잔을 부딪쳤다.
"캬, 달다!"
그녀가 상추에 회 두 점을 올리고 마늘까지 얹어 야무지게 쌈을 싸서 내 입에 넣어주었다. 오물오물 씹으며 그녀를 보는데, 문득 궁금해졌다.
"근데 누나."
"응?"
"누나는 내 첫인상 어땠어? 그리고... 언제부터 내가 남자로 보였어?"
내 돌발 질문에 그녀가 젓가락을 멈칫했다. 그녀는 장난기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되물었다.
"너부터 말해. 넌 나 언제부터 좋아했어?"
"나야 뭐...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형이었지. 근데 결정적인 건, 내가 다쳤을 때 누나가 울었잖아. 그때 알았어. 이 여자는 내가 지켜줘야겠구나."
내 대답에 그녀가 피식 웃더니, 소주 한 잔을 털어 넣고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줄까? 처음에 넌 그냥... '어린애'였어. 동생 같고, 귀엽고."
"치... 그럴 줄 알았어."
"그런데."
그녀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날 밤, 깡패들한테 쫓길 때 네가 나를 골목 안으로 밀어 넣고 입구에 딱 버티고 섰잖아. 덜덜 떨면서도 '여긴 내가 막을 테니까 도망가'라고 했을 때."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진지해졌다.
"그때 네 뒷모습이... 진짜 남자더라. 무서웠을 텐데, 도망가지 않고 나를 지키려고 버티는 그 모습에 심장이 쿵 했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구나, 이 남자는 진짜구나 싶었지."
그녀의 고백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날의 나는 그저 허세 부리는 꼬맹이인 줄 알았는데, 그녀의 눈에는 남자로 보였다니.
"고마워, 호준아. 나 지켜줘서."
우리는 쑥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다시 건배했다. 파도 소리는 BGM이 되고, 회 한 점에 소주 한 잔, 그리고 서로를 향한 진심 한 스푼. 그날 속초의 바다는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으로 남았다.
돌아오는 길, 여전히 운전은 서툰 그녀였지만 나는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옆자리에 내가 있으니까. 내가 그녀의 내비게이션이 되고, 보디가드가 되어줄 테니까. 우리의 첫 여행은 그렇게 완벽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다.
작가후기
가물가물한 기억으로 인해
상당히 미화가 된 호준이 입니다.
글쎄요. 뭐 추억인거죠....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