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같았던 강원도 여행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서울의 병원으로, 나는 광주의 캠퍼스로. 몸은 멀어졌지만, 우리에겐 '문명의 이기'가 있었다. 바로 그녀가 선물해 준(명의는 그녀지만) 모토로라 핸드폰이었다.
"자기야, 밥 먹었어?"
"응, 누나도 먹었어? 오늘 병원 바빴지?"
수업 시간만 빼고 우리는 수시로 통화했다. 잠들기 전에는 전화기를 붙잡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속삭였다.
"통화료는 내가 낼 거야!"
핸드폰을 개통할 때 내가 큰소리쳤던 그 약속은, 한 달 뒤 내 자취방 우편함에 꽂힌 고지서 한 장으로 인해 산산조각 났다.
[청구 금액: 385,000원]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0'이 하나 더 붙은 게 아닐까? 1996년, 짜장면 한 그릇이 2,000원 하던 시절이었다. 대학생 한 달 하숙비에 맞먹는 금액이 고지서에 찍혀 있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어머니(김 여사님)가 아시면 나는 그날로 호적에서 파일지도 모른다.
'막아야 한다. 내 사랑과 내 호적을 위해.'
그날부터 나는 '알바 전선'에 뛰어들었다. 낭만적인 캠퍼스 라이프? 그런 건 사치였다. 수업이 끝나면 학교 앞 호프집 서빙을 했고, 주말에는 인력 사무소에 나가 속칭 '노가다(건설 현장)'를 뛰었다.
"어이, 학생! 벽돌 좀 빨리빨리 날라!"
"네! 갑니다!"
등짐을 지고 계단을 오를 때마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시멘트 가루가 땀구멍마다 박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쉴 때마다 주머니 속 핸드폰을 꺼내 보면, 액정에 뜬 그녀의 번호(또는 음성 메시지 알림) 하나에 피로가 씻은 듯 사라졌다.
[호준아, 많이 힘들지? 밥 꼭 챙겨 먹어. 사랑해.]
그 짧은 문자, 그 목소리 하나를 듣기 위해 나는 기꺼이 내 젊음을 헐값에 팔았다. 밤늦게 자취방에 돌아와 퉁퉁 부은 다리를 두드리면서도, 그녀와 통화만 연결되면 내 목소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밝아졌다.
"응, 누나! 나 하나도 안 힘들어. 운동 삼아 하는 거지 뭐."
거짓말이었다. 죽을 만큼 힘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선물해 준 이 '비싼 장난감' 덕분에 우리는 300km의 거리를 뛰어넘어 매일 밤 함께 있을 수 있었다.
월급날, 땀 냄새 쩐 돈을 입금하고 고지서를 해결했을 때의 그 짜릿함이란. 친구 녀석들은
"미친놈, 그 돈이면 술이 몇 병이냐"
라고 혀를 찼지만, 나는 웃을 수 있었다. 술은 마시면 오줌으로 나가지만, 그녀와의 통화는 내 가슴에 추억으로 남으니까.
비록 내 통장은 '텅장'이 되었고, 몸은 골병이 들어갔지만, 1996년의 여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고도 비싼 연애의 계절이었다.
작가후기
네 비샀습니다.
핸드폰 무서웠어요.
지금은 누구나 들고다니는 스마트 폰 이지만
당시에는 무겁고 무서운 그런 존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