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목숨 건 드라이브, 그리고 7번 국도의 파도소리

by 홀로서기

"누... 누나! 브레이크! 브레이크!"


내 비명소리가 강원도 산골짜기에 메아리쳤다. 낭만적인 여행? 개나 줘버리라고 해라. 이건 생존 게임이었다. 1996년의 영동고속도로는 지금처럼 잘 뚫린 길이 아니었다. 대관령 굽이굽이 아흔아홉 구비를 넘어야 하는 난코스 중의 난코스. 설상가상으로 운전대를 잡은 그녀는 면허를 딴 지 갓 한 달 된 '초보 중의 왕초보'였다.


"호준아, 나 무서워! 옆에서 지도 좀 잘 봐봐!"

"지도가 문제가 아니라고! 앞을 봐, 앞을! 커브야!"


우리는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발라드가 락 음악으로 들릴 만큼 비명을 지르며 산을 넘었다. 그녀는 핸들을 부여잡고 식은땀을 흘렸고, 나는 조수석 손잡이를 뜯어낼 기세로 꽉 잡고 있었다. 낭만은커녕, 살아서 바다를 볼 수 있을까를 걱정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속초에 도착했을 땐 이미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숙소인 콘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서야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리는 후들거렸지만, 서로의 꼴을 보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잔뜩 긴장해서 헝클어진 머리, 땀범벅이 된 얼굴.


"살았다..."

"그러게. 우리 진짜 죽다 살았네."


우리는 짐을 풀기도 전에 콘도 앞바다로 나갔다. 칠흑 같은 어둠 속, 철썩이는 파도 소리만 가득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을 보며 그녀가 내 어깨에 기댔다. 아까의 공포는 사라지고, 짭조름한 바다 내음과 함께 묘한 침묵이 흘렀다.


"호준아."

"응."

"나... 너랑 오길 잘한 것 같아."


그녀의 말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우리는 말없이 손을 잡고 숙소로 들어왔다. 방 하나, 거실 하나가 있는 작은 콘도. 냉장고에 사 온 맥주와 안주를 넣으면서도 내 시선은 자꾸만 방 안에 있는 침대로 향했다.


'정신 차려, 이호준. 촌스럽게 티 내지 말자.'


샤워를 마치고 나온 그녀에게서 비누 향기가 났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나오는 그녀는, 무대 위에서 봤던 그 어떤 여배우보다 아름다웠다. 우리는 거실 바닥에 앉아 맥주 캔을 땄다.


"짠."

"짠. 공연하느라 고생했어, 우리 배우님."


알코올이 들어가자 긴장이 조금씩 풀렸다. 우리는 공연 이야기, 오는 길에 겪은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밤이 깊어질수록, 대화 사이사이의 공백이 길어졌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호준아."


그녀가 맥주 캔을 내려놓으며 나를 빤히 쳐다봤다. 약간 취기가 오른 붉은 볼, 풀린 눈동자.


"너... 나한테 할 말 없어?"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스무 살의 나는 계산 같은 건 할 줄 몰랐다. 그저 눈앞의 여자가 너무 사랑스럽고, 안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마시던 캔을 내려놓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하지만 단단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사랑해, 누나. 아니... 정아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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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누나가 아닌, 내 여자로. 그녀가 놀란 눈으로 나를 보다가, 이내 내 목에 팔을 감았다. 우리의 입술이 겹쳐졌다. 터미널에서의 첫 키스가 빗물 맛이었다면, 강원도에서의 키스는 바다 냄새가 섞인 맥주 맛이었다.

그날 밤, 7번 국도변의 파도 소리는 밤새도록 멈추지 않았고, 우리는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며 새벽을 맞이했다. 그녀는 더 이상 나를 '어린애'로 보지 않았고, 나 역시 그녀를 '어려운 누나'로 대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날 밤, 진짜 연인이 되었다.


작가 후기 입니다.

네.......

행복했던 거 같습니다.

기억에 저편에 있었던 내용이지만......그래요.....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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