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고사가 끝난 10월의 어느 주말. 원래라면 나는 컴컴한 지하 연습실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어야 했다. 다가올 정기 공연 준비로 주말 반납은 예사였으니까.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연출 교수님이
"이번 주는 다들 좀 쉬고 머리 좀 식혀라"
라며 특별 휴가를 주신 것이다.
'이건 기회다!'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땀 냄새나는 연습복을 벗어 던지고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보고 싶은 누나와 종로 데이트를 할 생각에 배낭 속에는 커플티까지 야무지게 챙겨 넣은 상태였다.
약속 장소는 그녀가 근무하는 서울의 종합병원 로비. 하지만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나도 그녀는 나오지 않았다. 삐삐를 쳐도 답이 없었다. 응급 환자가 생겼나? 초조하게 로비를 서성인지 2시간째. 드디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녀가 걸어 나왔다.
"호준아... 미안해. 인계가 늦어져서..."
그녀의 모습은 내 상상 속의 '화려한 서울 여자'가 아니었다. 방금 유니폼을 갈아입고 나왔지만,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고 옷에서는 희미하게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났다. 무엇보다 눈 밑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와 있었다.
"아... 밑에 애들이 오늘 대형 사고를 쳐서 그거 수습하느라 늦었어. 수간호사님은 나보고 교육 어떻게 시켰냐고 난리지... 진짜 사표를 던지든가 해야지."
우리는 근사한 레스토랑 대신 병원 근처 포장마차로 향했다.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다리를 주무르며 신발을 살짝 벗었다. 하루 종일 병동을 뛰어다니느라 퉁퉁 부은 발이 보였다.
"이모, 여기 우동 두 개랑 소주 한 병이요."
주황색 천막 아래,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우동을 앞에 두고 그녀가 첫 잔을 들이켰다.
"캬... 소독약 냄새가 이제 좀 씻겨 내려가는 것 같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많이 힘들었어? 누나 짬밥에도 혼날 일이 있어?"
그녀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더 서럽지. 연차 쌓이면 편해질 줄 알았는데, 위에서는 쪼아대지 밑에 애들은 말 안 듣지... 딱 샌드위치 신세야. 3교대라 몸은 힘들고, 너랑 데이트할 시간도 없고."
순간, 말문이 막혔다. 지하 연습실에서 밤새우며 대사 외우는 게 세상에서 제일 힘든 줄 알았던 스무 살의 나.
"나도 연습 빡세다"
라고 투정 부리려던 말이 쏙 들어갔다. 내 눈앞의 여자는 매일 위아래로 치이는 전쟁터에서, 책임감의 무게를 견디며 버티고 있었으니까.
그녀의 퉁퉁 부은 다리와 거칠어진 손을 보며, 나는 처음으로 '격차'를 느꼈다. 나이 차이가 아니라, '어른의 삶'이 주는 무게의 차이였다.
"누나."
나는 용기를 내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내가 빨리 커서... 누나 호강시켜 줄게. 진짜야. 나중에 병원 그만두고 나한테 시집와."
내 뜬금없는 프러포즈에 그녀가 빵 터지며 웃었다. 우울했던 얼굴에 비로소 생기가 돌았다.
"어구, 우리 애기. 말이라도 고맙네. 그래, 너 믿고 버틴다 내가."
그녀는 내 어묵 국물에 숟가락을 넣어주며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연습 땡땡이치지 말고 열심히 해서 얼른 성공해. 알았지?"
우리는 밤새 소주잔을 기울이며 웃었지만, 광주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나는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창밖의 캄캄한 어둠을 보며 다짐했다. 그녀가 더 이상 소독약 냄새에 쩔어 한숨 쉬지 않게 하려면, 내가 생각보다 더 빨리, 더 단단하게 자라야겠다고. 그날 포장마차의 우동 국물 맛은, 어른이 되어가는 쌉싸름한 맛이었다.
작가후기
오늘도 한편!!
기억의 미화는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누나도 멋지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