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개강, 절대반지의 위력, 그리고 음성사서함

by 홀로서기

9월, 개강을 맞은 캠퍼스에는 가을 냄새가 났다. 방학 내내 '노가다' 현장에서 땀을 흘리며 검게 그을린 내 피부는, 뽀얀 얼굴의 동기들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었다. 하지만 내 피부보다 더 시선을 끄는 건 따로 있었다. 바로 내 왼쪽 약지에서 번쩍이는 14K 금반지였다.


"야, 이호준! 너 그 반지 뭐냐?"

"뭐긴. 커플링이지."

"헐... 진짜냐? 그 서울 누나랑?"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녀석들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었다. 여름 방학 동안 내가 잠적(?)하고 돈을 번 이유가 이 반지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된 녀석들은 경악과 부러움이 섞인 탄성을 질렀다. 마치 '절대반지'라도 낀 것처럼,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야, 열 살 연상이라며. 세대 차이 안 나냐?"

"안 나거든? 너네보다 훨씬 대화 잘 통하거든?"


녀석들의 짓궂은 질문 공세에도 나는 여유로웠다. 이 반지는 단순한 액세서리가 아니었다. 내가 그녀의 남자라는 '증명서'이자, 서울에 있는 그녀와 나를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끈이었다. 미팅이나 소개팅 제의가 들어와도 반지를 슥 보여주면 상황 종료였다.

하지만 반지의 위력도 밤이 되면 약해졌다. 가을 타는 남자라고 했던가.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그녀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핸드폰 통화료는 여전히 부담스러웠기에, 우리는 다시 삐삐(무선호출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 시절, 삐삐에는 '음성 사서함' 기능이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삐삐를 확인하면 어김없이 호출이 와 있었다. 공중전화로 달려가 비밀번호를 누르면, 지직거리는 잡음 섞인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호준아, 오늘 하루도 고생했어. 밥은 먹었니? 서울은 비가 오네... 네 생각 많이 난다. 사랑해."


그녀의 목소리는 하루의 피로를 씻어주는 비타민이었다. 가끔은 목소리 대신 노래가 들어있을 때도 있었다. 수화기를 라디오나 카세트 스피커에 대고 녹음한 것이었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나 이소라의 '난 행복해' 같은 노래들이 흘러나오면, 나는 좁은 공중전화 부스 안에 쪼그리고 앉아 그 노래가 끝날 때까지 수화기를 놓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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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안 나와? 뒤에 사람 기다리는데!"


뒤에서 기다리던 아저씨의 타박에 화들짝 놀라 나오면서도, 내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주파수를 타고 연결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목소리를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반복해서 들으며, 1996년의 가을을 건너고 있었다.

이 반지가 내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한,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가 사서함에 남아있는 한, 나의 가을은 결코 쓸쓸하지 않았다.


작가후기

네 브런치 처음해봐서......

이것저것 누르고 있습니다.

1화~15화 묶어서 브런치 북이라는 거 해봤습니다^^

재미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