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1월. 격포 바다의 뜨거웠던 여름은 꿈처럼 지나갔고, 캠퍼스엔 스산한 낙엽 대신 '국가 부도'라는 낯선 공포가 덮쳐왔다. 뉴스에선 연일 'IMF 구제금융' 소식이 흘러나왔고, 거리엔 넥타이를 맨 채 갈 곳 잃은 가장들이 넘쳐났다.
서울의 종합병원 간호사인 그녀에게도 그 여파는 밀려왔다.
"호준아... 나 이번 주 못 내려가."
"왜? 병원에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빠 회사가... 부도나셨어."
수화기 너머 잠긴 목소리. 그녀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중소기업이 연쇄 부도의 직격탄을 맞았다고 했다. 하루아침에 집안의 가장이 되어버린 그녀. 3교대 근무로 번 월급은 이제 그녀의 립스틱이나 옷을 사는 데 쓰이는 게 아니라,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생명줄'이 되어버렸다.
2주 만에 그녀가 광주로 내려왔다. 늘 타던 흰색 프라이드 대신, 낡은 고속버스를 타고 왔다. 기름값이라도 아껴야 했으니까. 터미널 대합실에서 만난 그녀는 소독약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유니폼 차림 위에 얇은 코트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누나, 얼굴이 반쪽이다."
"괜찮아. 나이트(밤 근무) 끝나고 바로 와서 그래."
우리는 단골 고깃집 대신 학교 앞 저렴한 분식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떡볶이를 깨작거리며 애써 웃어 보였지만, 나는 보았다. 그녀의 낡은 지갑 속에 꼬깃꼬깃 접혀 있는, 병원 대출 신청서와 아버지가 보낸 미안함 가득한 편지를.
"호준아."
"어?"
"나 당분간은... 너 맛있는 거 많이 못 사줘. 그리고 자주 못 내려올 수도 있어. 미안해."
그 말이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지금 벼랑 끝에 선 건 본인인데, 왜 나한테 미안해하는 건가. 자신도 휘청거리는 삶의 무게 속에서, 여전히 철없는 대학생 남자친구의 밥값을 걱정하는 그녀가 너무 고맙고 또 미안해서 목이 메었다.
나는 테이블 위로 뻗은 그녀의 거친 손을 꽉 잡았다. 매일 환자들의 주사를 놓고 피 고름을 닦아내느라 트고 갈라진 간호사의 손이었다.
"바보야. 누가 사달래? 나 이제 돈 벌어."
"네가 무슨 돈이 있어? 또 노가다 하려고?"
"어. 나 이제 '오야지(작업반장)'한테 인정받은 에이스야. 내 밥벌이는 내가 해."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 자존심을 걸고.
"그러니까 누나, 힘들면 나한테 기대. 내가 아직 가진 건 튼튼한 몸뚱이밖에 없지만, 누나 업고 뛸 체력은 있어. 누나 혼자 짊어지려고 하지 마."
그녀의 눈가가 붉어지더니, 떡볶이 국물 위로 눈물 방울이 툭 떨어졌다.
"그래... 고맙다 호준아. 너밖에 없네."
그날 밤, 그녀를 서울행 막차에 태워 보내고 돌아오는 길. 찬 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들었지만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지 않았다. 주머니 속엔 그녀가 사준 011 핸드폰이 뜨겁게 울리고 있었다.
1997년의 겨울. 대한민국은 얼어붙었지만, 나는 이를 악물었다.
'더 이상 그녀의 등골을 빼먹는 연하남은 되지 않겠다.'
그녀가 병원에서, 그리고 무너진 집안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 나 역시 이 지독한 현실과 싸워 그녀를 지켜내리라 다짐했다.
작가후기
imf는 정말 무서웠습니다.
당시에는 와 닿지 않았지만......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