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IMF의 겨울, 장갑 한 켤레의 온기

by 홀로서기

1997년 12월. 거리에는 구세군 종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IMF 한파는 매서웠다. 환율은 폭등했고, 기업들은 줄도산했다. '금 모으기 운동' 뉴스가 연일 TV를 채우던,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우울한 크리스마스였다.


"호준아, 나 이번 크리스마스에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아. 오프(휴무) 받았어."

"진짜? 잘됐다. 맛있는 거 해놓고 기다릴게."


전화를 끊고 나는 지갑을 열어봤다. 천 원짜리 몇 장과 동전들. 누나는 집안 빚 갚느라 월급을 고스란히 쏟아붓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빈손으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할 순 없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다시 새벽 인력시장으로 향했다. 겨울의 공사판은 여름과는 차원이 달랐다. 살을 에는 칼바람이 불 때마다 시멘트 포대를 멘 어깨가 끊어질 듯 시려왔다. 언 손을 입김으로 호호 불어가며 벽돌을 날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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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다 나르면... 누나 장갑 하나는 살 수 있다.'


그녀의 손이 자꾸 눈에 밟혔다. 독한 소독약과 잦은 손 씻기로 거칠게 트고 갈라진 간호사의 손. 그 손을 따뜻하게 감싸줄 빨간 벙어리장갑이 백화점 쇼윈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광주에 도착한 그녀는 전보다 더 말라 있었다. 우리는 비싼 레스토랑 대신, 내 자취방에 앉아 '케이크 하나와 소주 한 병'을 놓고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보일러 기름값을 아끼느라 방바닥은 미지근했지만, 서로의 체온이 있어 춥지 않았다.


"호준아, 미안해. 선물도 못 사 오고..."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나는 등 뒤에 숨겨둔 포장지를 꺼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있잖아."

"이게 뭐야?"

"열어봐."


그녀가 포장을 뜯자, 새빨간 털장갑이 나왔다. 당시 내 3일 치 일당을 털어 산, 나름 메이커 장갑이었다.


"누나 손, 너무 차갑더라. 병원에서 일할 땐 못 껴도 출퇴근할 땐 꼭 끼고 다녀."


그녀는 장갑을 한참 동안 만지작거리더니,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바보야... 너 패딩 다 찢어졌잖아. 네 옷이나 사지..."


그녀는 내 낡은 점퍼 소매를 잡고 펑펑 울었다.

나는 장갑을 낀 그녀의 두 손을 내 볼에 갖다 댔다. 까슬까슬한 털실의 감촉이 따뜻했다.


"나 안 추워. 누나 마음이 따뜻해서 하나도 안 추워."


그날 밤, 우리는 좁은 자취방에서 서로를 꽉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밖에는 IMF라는 거대한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지만, 장갑 한 켤레를 나눠 낀 우리의 사랑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1997년의 크리스마스. 가진 건 없었지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큰 선물이었다.


작가후기

당시에는 정말 돈쓰기 무서웠습니다.

노가다도 열심히 했었고요.

지금도 그렇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