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주머니가 허전했다. 늘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던 검은색 모토로라 핸드폰. 그녀가 할부로 끊어주었고, 우리가 매일 밤 사랑을 속삭였던 그 기계는 이제 내 손에 없다.
아까 마로니에 공원 벤치에서 일어설 때였다. 나는 테이블 위에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이것도 가져가. 누나 명의잖아. 요금 낼 돈도 없고, 이제 필요 없어."
그걸 밀어놓는 내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던 걸 누나는 봤을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차가운 핸드폰을 쥐고 울기만 했다. "너한테 짐 되기 싫다"며 모진 말을 뱉어놓고 핸드폰을 챙겨 오는 건, 내 마지막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 나와 세상을 연결해 주는 건, 허리춤에 달린 낡은 삐삐(호출기) 하나뿐이다. 최신 문명세계에서 추방당해, 다시 원시시대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자취방 문을 열자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제까지만 해도 '누나를 위해 성공하겠다'고 다짐했던 이 공간이, 이제는 나를 가두는 독방처럼 느껴졌다.
그날부터 나는 '좀비'가 되었다. 학교에는 나갔지만 강의 내용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동기들이 "주말에 서울 가서 뭐 했냐?"고 물으면 "어, 그냥 뭐..." 하고 얼버무렸다. 밥알은 모래알 같았고, 소주는 맹물 같았다.
가장 견디기 힘든 건, 역시 삐삐였다.
헤어지자고 말하고 돌아선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삐삐가 울려 댔다.
[8282] (빨리빨리 전화해) [486] (사랑해) [1004] (나의 천사)
익숙한 번호, 그리고 우리만의 암호들. 허리춤에서 '드르륵' 진동이 느껴질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확인하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학교 앞 공중전화부스 앞을 열 번도 넘게 서성이다가, 수화기를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목요일 밤이었다. 술에 잔뜩 취해 들어와 쓰러져 있는데, 또다시 삐삐가 울렸다.
이번엔 번호가 아닌 [음성 메시지] 표시가 떴다.
취기가 비겁한 용기를 줬을까. 나는 떨리는 손으로 유선전화 수화기를 들고 음성 사서함 비밀번호를 눌렀다.
"...호준아. 나야."
물기 어린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나 너 믿어. 네가 한 말, 다 거짓말인 거 알아. 그 의사 선생님?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왜 그러는지 아는데...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우리 얼굴 보고 다시 얘기해. 응? 전화 줘. 기다릴게."
메시지가 끝나고 '삐-' 소리가 났지만,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했다. 누나의 숨소리가 남아있는 것 같아서. 당장이라도 수화기 너머로 "누나, 미안해. 거짓말이었어. 보고 싶어"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 아버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네가 그 의사 놈보다 단단해져라. 그게 증명이다.'
지금 내가 다시 전화를 걸면, 우리는 또다시 현실의 벽 앞에 서게 된다. 나는 여전히 핸드폰 요금도 못 내는 가난한 대학생이고, 그녀는 부모님의 기대와 의사의 청혼을 받는 30대 여성이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전화기 버튼을 눌렀다. [삭제] 버튼이었다.
"메시지가 삭제되었습니다."
그 기계적인 안내 멘트가 우리 사랑의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나는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가위를 꺼냈다. 삐삐 호출기의 배터리 덮개를 열고, 건전지를 뺐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책상 깊숙한 서랍에 처박고 열쇠로 잠가버렸다.
영원히 사랑하자던 그 숫자의 약속은, 1998년 가을의 문턱에서 그렇게 폐기 처분되었다. 이제 나는 세상과, 그리고 그녀와 완벽하게 단절되었다.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김광석의 '부치지 않은 편지'를 틀었다.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지독하게 고요한 밤이었다.
작가후기
아 슬프다. 그대의 기억이 가련하게 떠올랐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