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내 생애 가장 비참한 연극

by 홀로서기

1998년 9월의 마지막 일요일. 서울을 떠나 광주로 내려가기 직전, 나는 마지막으로 누나를 불러냈다. 장소는 우리가 자주 가던 대학로의 마로니에 공원이었다.

오후의 햇살은 따스했지만, 내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나는 마음속으로 수없이 대사를 리허설했다.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진부한 신파극이 아니었다. '지쳐서 도망가는 무능력한 놈'이 되는 삼류 드라마의 악역. 그게 오늘 내 배역이었다.


"호준아! 많이 기다렸어?"


멀리서 누나가 달려왔다. 여전히 환하게 웃는 얼굴. 어제 어머니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병원 앞에서 내가 무엇을 봤는지 꿈에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 해맑음이 내 가슴을 더 후벼 팠다.


"어, 왔어?"


나는 일부러 시선을 피하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리고 벤치에 앉자마자 담배를 꺼내 물었다. 누나가 싫어하는 행동이었다.


"호준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버님이 뭐라셔?"

"아니. 그냥... 누나, 우리 그만하자."


담배 연기를 길게 뿜으며 던진 한마디. 누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아니야. 나 좀 지쳤어. 광주 내려가는 것도 지겹고, 삐삐 쳐다보며 연락 기다리는 것도 피곤해. 솔직히... 나 군대도 가야 하고, 제대하면 복학해서 언제 취직할지도 모르잖아."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준비했던 결정적인 대사를 뱉었다.


"어제 병원 앞에서 봤어. 그 의사 양반."


누나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호준아, 그건 오해야. 그냥 집까지 태워다 준다고 해서..."

"알아. 근데 누나, 솔직히 그 사람 차 타니까 편했지? 나랑 버스 타고 다니는 것보다 훨씬 좋았잖아."

"야! 이호준! 너 말을 왜 그렇게 해?" "현실이 그렇잖아! 난 누나한테 떡볶이 사주는 것도 손 떨리는데, 그 사람은 스테이크 사줄 수 있잖아. 나 쪽팔려서 더는 못하겠어. 내 자격지심 때문에 누나 만나는 게 괴롭다고."


거짓말이었다. 쪽팔린 건 사실이었지만, 그것 때문에 헤어지고 싶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감독의 '컷' 사인이 없는 연극이었다.


"어머니 말씀이 맞아. 누나 이제 서른 셋이야. 나 같은 놈 기다리면서 청춘 낭비하지 마. 그 의사 만나. 그게 누나한테도, 나한테도 해피엔딩이야."


누나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뺨을 때릴 줄 알았는데, 누나는 그저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그 모습이 너무 작고 애처로워서 당장이라도 안아주고 싶었지만, 나는 주먹을 꽉 쥐고 허벅지를 꼬집으며 참았다.


"갈게. 광주 내려가야 해. 연락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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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 뒤에서 누나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대학로의 인파 속으로 숨어들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사람들이 쳐다봤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연극영화과 학생이었다. 무대 위에서 수백 번도 넘게 연기를 했다. 하지만 오늘,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쓰레기가 되어야 했던 이 연기야말로 내 생애 최고의 연기이자, 가장 비참한 연극이었다.

터미널로 가는 버스 안, 라디오에서는 토이의 '내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 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작가후기

네 드디어 저질렀습니다.

그때 생각에 좀 괴롭기도 하더군요.

그랬다고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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