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 가을의 전설, 그리고 하얀 가운의 무게

by 홀로서기

1998년 9월. 지리산 계곡의 뜨거웠던 태양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주말을 맞아 오랜만에 서울 본가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차창 밖으로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이 보였지만, 내 마음은 풍요로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삐삐가 울렸다. 낯선 번호. 공중전화로 확인해보니 정아 누나의 어머니셨다.


"호준 학생이니? 나 정아 엄마다. 서울 왔으면 잠시 볼 수 있겠니?"


약속 장소는 강남의 한 호텔 커피숍이었다. 학교 앞 자판기 커피가 익숙한 내게, 호텔 로비의 푹신한 소파는 가시방석 같았다. 잠시 후, 어머니가 맞은편에 앉으셨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 차 한 잔 마셔."


어머니는 화를 내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차분하고 교양 있는 태도가 나를 더 주눅 들게 했다.


"호준아, 지난번 여름휴가 때... 우리 정아 데리고 지리산 다녀왔다지? 고맙다. 우리 딸 웃게 해 줘서."

"아닙니다. 제가 더..."

"그런데 호준아. 현실을 좀 봤으면 좋겠구나. 정아, 이제 서른 셋이야. 내 친구들은 벌써 손주 본다는 소리도 해."


어머니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솔직히 말할게. 병원에 '김 선생'이라고 있어. 내과 의사야. 나이도 비슷하고, 집안도 좋고... 무엇보다 정아를 평생 고생 안 시킬 사람이야."


김 선생. 의사. 내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단어들이었다. 어머니의 다음 말은 결정타였다.


"자네가 나쁘다는 게 아니야. 단지, 자네는 아직 학생이고... 군대도 가야 하고... 자네가 정아를 진짜 사랑한다면, 놔주는 게 어른스러운 거 아닐까?"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성공해서 호강시켜 드리겠습니다"라는 말은, 당장 광주 내려갈 차비와 자취방 월세를 걱정해야 하는 내 현실 앞에서는 허공에 흩어지는 농담만도 못했다.

어머니와 헤어지고 정처 없이 걸었다. 발길이 닿은 곳은 정아 누나의 병원 앞이었다. 퇴근 시간. 멀리서 정아 누나가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녀 옆에는... 어머니가 말한 그 '김 선생'이 있었다.

하얀 가운을 벗고 말끔한 셔츠를 입은 남자. 그는 낡은 운동화를 신은 나와는 다른 세상 사람 같았다. 그가 웃으며 자신의 검은색 세단 조수석 문을 열어주자, 누나가 자연스럽게 올라탔다.

마치 잘 짜인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 프레임 속에 '지방대생 연하 남자친구'가 낄 자리는 없었다. 나는 가로수 뒤에 숨어 그 차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질투가 아니었다. 그것은 완벽한 '패배감'이었다.

터덜터덜 서울 본가로 들어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거실에 계시던 아버지가 내 얼굴을 보셨다. 넋이 나간 아들의 표정을 단번에 읽으신 걸까. 아버지는 묻지도 않고 부엌에서 소주 한 병과 김치를 꺼내 오셨다.


"앉아라. 한잔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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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따라주시는 소주잔을 받는데,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버지... 사랑하는데 헤어지는 게 맞는 거예요?"

"......"

"저쪽에는 의사가 좋대요. 차도 있고, 병원도 있고... 저는 가진 게 쥐뿔도 없는데. 제가 누나 잡고 있는 게... 죄짓는 것 같아요."


참았던 눈물이 툭 하고 밥상 위로 떨어졌다. 아버지는 말없이 자신의 잔을 비우시더니, 투박한 손으로 내 어깨를 툭툭 치셨다.


"못난 놈.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아버지의 목소리는 거칠었지만, 그 속엔 깊은 한숨이 섞여 있었다.


"근데 아들아, 부모 마음은 다 똑같다. 내 새끼 고생 안 시키고 싶은 그 마음... 그걸 원망하진 마라. 가난이 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은 창문으로 도망간다는 말이 있어. 지금 시절(IMF)이 그렇다. 네 잘못이 아니다."


아버지가 다시 내 빈 잔에 술을 채워주셨다.


"억울하냐? 분해? 그럼 울지 말고 힘을 키워. 네가 그 의사 놈보다 더 단단해지면 된다. 그게 네가 할 복수고, 증명이야. 마셔라."


그날 밤, 나는 서울 본가 거실에서 아버지와 대작하며 생애 처음으로 쓴 소주를 연거푸 들이켰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알코올보다, 현실의 쓴맛이 더 지독하게 느껴지는 1998년의 가을밤이었다.



후기 입니다.

일단 제가 생각한 부분까지 왔습니다.

이 둘이 과연 어떻게 진행될지.......

현실로 갈지 상상으로 갈지 고민이 되네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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