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9월. 지리산 계곡의 뜨거웠던 태양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주말을 맞아 오랜만에 서울 본가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차창 밖으로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이 보였지만, 내 마음은 풍요로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삐삐가 울렸다. 낯선 번호. 공중전화로 확인해보니 정아 누나의 어머니셨다.
"호준 학생이니? 나 정아 엄마다. 서울 왔으면 잠시 볼 수 있겠니?"
약속 장소는 강남의 한 호텔 커피숍이었다. 학교 앞 자판기 커피가 익숙한 내게, 호텔 로비의 푹신한 소파는 가시방석 같았다. 잠시 후, 어머니가 맞은편에 앉으셨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 차 한 잔 마셔."
어머니는 화를 내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차분하고 교양 있는 태도가 나를 더 주눅 들게 했다.
"호준아, 지난번 여름휴가 때... 우리 정아 데리고 지리산 다녀왔다지? 고맙다. 우리 딸 웃게 해 줘서."
"아닙니다. 제가 더..."
"그런데 호준아. 현실을 좀 봤으면 좋겠구나. 정아, 이제 서른 셋이야. 내 친구들은 벌써 손주 본다는 소리도 해."
어머니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솔직히 말할게. 병원에 '김 선생'이라고 있어. 내과 의사야. 나이도 비슷하고, 집안도 좋고... 무엇보다 정아를 평생 고생 안 시킬 사람이야."
김 선생. 의사. 내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단어들이었다. 어머니의 다음 말은 결정타였다.
"자네가 나쁘다는 게 아니야. 단지, 자네는 아직 학생이고... 군대도 가야 하고... 자네가 정아를 진짜 사랑한다면, 놔주는 게 어른스러운 거 아닐까?"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성공해서 호강시켜 드리겠습니다"라는 말은, 당장 광주 내려갈 차비와 자취방 월세를 걱정해야 하는 내 현실 앞에서는 허공에 흩어지는 농담만도 못했다.
어머니와 헤어지고 정처 없이 걸었다. 발길이 닿은 곳은 정아 누나의 병원 앞이었다. 퇴근 시간. 멀리서 정아 누나가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녀 옆에는... 어머니가 말한 그 '김 선생'이 있었다.
하얀 가운을 벗고 말끔한 셔츠를 입은 남자. 그는 낡은 운동화를 신은 나와는 다른 세상 사람 같았다. 그가 웃으며 자신의 검은색 세단 조수석 문을 열어주자, 누나가 자연스럽게 올라탔다.
마치 잘 짜인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 프레임 속에 '지방대생 연하 남자친구'가 낄 자리는 없었다. 나는 가로수 뒤에 숨어 그 차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질투가 아니었다. 그것은 완벽한 '패배감'이었다.
터덜터덜 서울 본가로 들어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거실에 계시던 아버지가 내 얼굴을 보셨다. 넋이 나간 아들의 표정을 단번에 읽으신 걸까. 아버지는 묻지도 않고 부엌에서 소주 한 병과 김치를 꺼내 오셨다.
"앉아라. 한잔하자."
아버지가 따라주시는 소주잔을 받는데,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버지... 사랑하는데 헤어지는 게 맞는 거예요?"
"......"
"저쪽에는 의사가 좋대요. 차도 있고, 병원도 있고... 저는 가진 게 쥐뿔도 없는데. 제가 누나 잡고 있는 게... 죄짓는 것 같아요."
참았던 눈물이 툭 하고 밥상 위로 떨어졌다. 아버지는 말없이 자신의 잔을 비우시더니, 투박한 손으로 내 어깨를 툭툭 치셨다.
"못난 놈.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아버지의 목소리는 거칠었지만, 그 속엔 깊은 한숨이 섞여 있었다.
"근데 아들아, 부모 마음은 다 똑같다. 내 새끼 고생 안 시키고 싶은 그 마음... 그걸 원망하진 마라. 가난이 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은 창문으로 도망간다는 말이 있어. 지금 시절(IMF)이 그렇다. 네 잘못이 아니다."
아버지가 다시 내 빈 잔에 술을 채워주셨다.
"억울하냐? 분해? 그럼 울지 말고 힘을 키워. 네가 그 의사 놈보다 더 단단해지면 된다. 그게 네가 할 복수고, 증명이야. 마셔라."
그날 밤, 나는 서울 본가 거실에서 아버지와 대작하며 생애 처음으로 쓴 소주를 연거푸 들이켰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알코올보다, 현실의 쓴맛이 더 지독하게 느껴지는 1998년의 가을밤이었다.
후기 입니다.
일단 제가 생각한 부분까지 왔습니다.
이 둘이 과연 어떻게 진행될지.......
현실로 갈지 상상으로 갈지 고민이 되네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