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번 훈련병... 아니, 이등병 이호준. 자대 전입을 명받았습니다!"
더블백을 메고 도착한 자대는 훈련소와는 차원이 다른 공포가 지배하고 있었다. 90년대 말의 내무반은 계급이 곧 법이었다. '각 잡기'와 '눈치 게임'이 일상인 곳. 이등병인 나는 숨 쉬는 것조차 허락을 받아야 할 것만 같았다.
"야, 신병. 애인 있냐?"
"없습니다!"
"없어? 거짓말하면 죽는다. 진짜 없어?"
"헤... 헤어졌습니다!"
선임들의 짓궂은 질문 공세가 쏟아지던 전입 일주일 차. 행정반에서 소포가 왔다. 어머니가 보내신 택배였다.
내무반 침상 끝에 각 잡고 앉아, 선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떨리는 손으로 박스를 뜯었다. 과자와 생필품, 그리고 바닥 깊숙한 곳에 하얀 편지 봉투 하나가 숨겨져 있었다.
어머니가 훈련소 편지에서 말씀하셨던, 정아 누나가 두고 간 그 편지였다.
"야, 그거 뭐야? 영장(연애편지) 아냐?"
"아, 아닙니다! 어머니 편지입니다!"
나는 황급히 편지를 건빵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당장 읽고 싶었지만, 이곳엔 사생활이란 게 없었다.
그날 밤. 점호가 끝나고 모두가 잠든 시간. 나는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퀴퀴한 암모니아 냄새와 나프탈렌 냄새가 진동하는 재래식 화장실. 그곳이 이 부대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나만의 독방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쭈그려 앉아, 건빵 주머니에서 구겨진 편지를 꺼냈다. 익숙한 누나의 글씨체. 봉투를 뜯자 은은한 그녀의 향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호준아, 나야. 어머니께 말씀 들었어. 군대 갔다고. 처음엔 너무 화가 나서 미칠 것 같더라. 나쁜 놈. 비겁한 놈. 어떻게 말 한마디 없이 그렇게 도망을 가니. 네가 했던 모진 말들, 그 의사 선생님 이야기... 나 하나도 안 믿었어. 네 눈이 너무 슬펐거든. 그래서 기다리려고 했어. 네가 자격지심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까, 내가 잡아주면 된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네가 이렇게까지 도망친 걸 보니, 이제 알겠더라. 내가 널 잡는 게 너한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걸. 호준아. 널 놔줄게. 네 뜻대로 해줄게.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해 줘. 네가 가진 게 없어서, 학생이라서, 널 사랑한 게 아니야. 그냥 스물두 살의 이호준이, 내 눈엔 세상에서 제일 빛나는 남자였어.
몸 건강히 잘 다녀와. 다치지 말고. 밥 잘 먹고. 나는... 잘 지낼게. 노력해 볼게. 안녕, 내 사랑.'
마지막 줄을 읽는데, 눈앞이 흐려져 더 이상 글씨가 보이지 않았다. 입을 틀어막았다. 소리를 내면 안 되니까. 화장실 밖에서는 보초 서는 고참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나는 허벅지를 꼬집고 입술을 깨물며 짐승처럼 꺽꺽거렸다.
"흐윽... 끄윽..."
나프탈렌 냄새가 진동하는 차가운 화장실 바닥. 나는 그곳에 주저앉아 편지를 가슴에 품고 한참을 울었다.
내가 버린 줄 알았던 사랑은, 사실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보다 어른이었고, 나는 끝까지 도망만 친 어린애였다.
1999년의 겨울밤. 최전방의 화장실은 세상에서 제일 냄새나고, 세상에서 제일 슬픈 공간이었다.
작가 후기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 당시 군대 화장실은......
나만의 공간이였죠........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