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총검술보다 아픈, 그리움의 습격

by 홀로서기


1999년 1월. 강원도 화천의 신병교육대. 세상은 '밀레니엄'이 온다며 Y2K 공포에 떨고 있었지만, 훈련병 48번 이호준에게 세상의 종말은 컴퓨터 오류가 아니었다. 영하 20도의 혹한과 피가 나고 알이 배긴다는 'P.R.I(사격술 예비 훈련)'가 바로 지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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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려! 굴러! 정신 안 차립니까!"


조교의 불호령에 눈밭을 굴렀다. 팔꿈치가 까지고 입술이 터졌다. 하지만 나는 그 고통이 싫지 않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를 때면, 잠시나마 정아 누나 생각이 나지 않았으니까.

나는 낮에는 'A급 훈련병'이었다. 목소리는 가장 컸고, 구보는 늘 선두였다. 동기들은 나를 '독종'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밤이 되면, 나는 가장 나약한 '폐급'으로 전락했다.

훈련소의 하이라이트, '첫 소포 및 편지 수령' 시간이 다가왔다.


"48번 훈련병 이호준! 편지 한 통!"


조교가 내 이름을 불렀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혹시? 아니겠지. 내가 입대한다고 말도 안 했는데. 주소도 모를 텐데. 기대하지 말자. 기대하면 무너진다.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든 편지 봉투. 발신인은 '사랑하는 엄마'였다. 안도감과 실망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점호가 끝나고 모포를 뒤집어쓴 채, 불침번 근무자가 비춰주는 희미한 손전등 불빛 아래서 편지를 뜯었다. 엄마의 삐뚤빼뚤한 글씨가 보였다.


'우리 아들, 밥은 잘 먹니? 춥지는 않고? 엄마는 네가 갑자기 떠나서 마음이 너무 아프다...'


눈물이 핑 돌았다. 입을 틀어막고 읽어 내려가던 중, 마지막 문단에서 내 심장이 멈췄다.


'참, 호준아. 며칠 전에 정아라는 아가씨가 집에 찾아왔었다. 너 군대 갔다고 하니까, 현관 앞에 주저앉아서 한참을 울다 갔어. 너희 무슨 일 있었니? 그 아가씨가 전해달라고 편지 한 통을 두고 갔는데... 훈련소라 못 보낸다길래 엄마가 잘 보관하고 있다. 자대 배치받으면 그때 보내주마.'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집에 찾아왔다고? 그 자존심 강한 누나가? 우리 집까지 와서 울었다고?

나쁜 놈으로 기억되길 바랐는데. 독하게 맘먹고 도망친 건데. 결국 나는 그녀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만 남기고 도망친 비겁자가 되어버렸다.


"흐윽..."


모포 속에서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를 참을 수가 없었다. 옆자리 동기가 잠결에 뒤척이며 "48번, 우냐?"라고 물었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꿈을 꿨다. 마로니에 공원 벤치에 홀로 앉아 있는 누나. 내가 훈련소에서 총검술을 하며 악을 쓸 때, 그녀는 서울 하늘 아래서 내 이름을 부르며 울고 있었다.

총검술로 찌른 건 적군의 심장이 아니라, 나를 기다리던 그녀의 가슴이었다. 훈련소의 밤은 너무 길고, 추웠다.




작가후기

그래요. 그랬어요.

저도 아팠고 그녀도 아팠죠.

그래도........그래야만 할 것 같았어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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