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병소를 빠져나와 춘천행 버스에 오를 때만 해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칼같이 다려 입은 A급 전투복과 반짝이는 전투화. 하지만 막상 서울 터미널에 내리자, 갈 곳이 없었다. 내가 가장 보여주고 싶었던 단 한 사람, 정아 누나가 내 곁에 없었으니까.
결국 휴가 첫날 저녁, 나는 대학로의 허름한 민속주점에서 동아리 동기였던 기태와 마주 앉았다.
"야, 이호준! 군대 가더니 완전 사람 됐네. 짠 하자!"
막걸리 몇 사발이 돌고, 취기가 적당히 올랐을 때였다. 기태가 안주를 뒤적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 정아 누나 소식 아냐?"
"...모른다. 알면 안 되지, 이제."
"하아, 이 미련한 새끼."
기태가 탁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너 군대 가고 나서 누나네 집 완전 뒤집어졌었어."
"뭐? 왜?"
"누나가 다 알았거든. 너 춘천 가기 며칠 전에, 누나 어머니가 너 따로 불러내서 헤어지라고 돈봉투 내밀고 모진 소리 하신 거."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누나가 어머니한테 울고불고 난리 치고, 집까지 나왔었대. 너한테 가겠다고. 근데 네 자취방 찾아갔더니 이미 넌 머리 깎고 입대해 버린 뒤였던 거지."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누나가 알고 있었다고? 내가 그 의사 놈에게 자격지심을 느껴서 떠난 게 아니라, 그녀의 어머니가 준 모멸감 때문에 억지로 악역을 자처했다는 걸?
'네가 이렇게까지 도망친 걸 보니, 이제 알겠더라. 널 놔줄게.'
화장실에서 숨죽여 읽었던 그녀의 편지가 뇌리를 스쳤다. 그녀가 포기한 건 나에 대한 사랑이 아니었다. 혼자서 상처받고 도망쳐버린 내 '비겁함'에 지쳤던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고 믿었지만, 결국 서로에게 가장 잔인한 상처만 남겼다.
"야! 이호준! 어디 가!"
나는 기태의 부름을 뒤로하고 주점을 뛰쳐나왔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지만, 무작정 뛰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누나가 살던 동네 어귀였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 숨을 헐떡이며 서성인지 두 시간쯤 지났을까. 골목 끝에서 검은색 그랜저 한 대가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왔다.
차 문이 열리고, 정아 누나가 내렸다. 그리고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가 자연스럽게 누나의 핸드백을 받아 들고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원하셨던, 사진 속의 그 의사 김 선생이었다.
누나는 피곤해 보였지만, 남자가 건네는 말에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폭풍 같았던 시간들이 지나가고, 그녀는 드디어 부모님이 원하는 '안정적인 궤도'에 안착해 있었다.
나는 전봇대 뒤에 몸을 숨겼다. 땀에 쩔은 군복, 까까머리, 주머니엔 만 원짜리 몇 장이 전부인 이등병. 지금 내가 저기 나타나서 "사실은 그게 아니었어"라고 말한들 무엇이 바뀔까. 그녀의 평온해진 삶에 또다시 진흙탕을 튀길 수는 없었다.
'나는... 잘 지낼게. 노력해 볼게.'
그녀가 편지에 남겼던 마지막 약속이 내 눈앞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는 꽉 쥔 주먹을 천천히 풀었다. 그리고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아무도 보지 못할 거수경례를 올렸다.
안녕, 내 첫사랑. 이번엔 진짜로 안녕.
눈물이 턱 끝을 타고 뚝뚝 떨어졌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 나왔다. 내 생애 가장 비참하고 뼈아팠던, 100일 휴가의 밤이었다.
[작가의 말]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너무 늦어버린 후였습니다. 내가 완벽하게 도망쳤기 때문에 그녀가 평온해질 수 있었다는 역설. 90년대 청춘들의 서툰 사랑은 그렇게 엇갈리며 어른이 되어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