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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타 May 12. 2022

맨발과 대지

<로마>(Roma)


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라 불리는 여자가 있다. 나이도 모르고 고향이 어딘지도 모른다. 양이 뛰놀고 흙냄새 풍기는 어떤 시골에서 멕시코시티로 왔다. 그녀는 한 백인 가정의 하녀가 되었다. 청소하고 음식을 만들고 심부름을 하고 빨래를 하고 개똥을 치우고 아이들을 재우는, 미즈텍어를 하는 자그마한 키의 소녀. "Si, señor."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없는 여자.


흑백의 영화는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바닥에 고인 물에 비치는 장면으로 시작해, 물에 비치기 전 그러니까 하늘을 가르는 비행기를 직접 찍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비행기는 영화 중간에도 다시 한번 등장하는데, 남자들에게 무술을 지도하는 프로페서 조벡이라는 사람의 머리 위로 날아간다. 이렇듯 간간이 등장한, 멀리 어렴풋이 지나가는 비행기의 모습은 마치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들을 은유하는 것 같다. 


아이 넷과 아내를 버려두고 바람이 난 의사 남편이나, 무술을 배우고 연마하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인 양 떠벌이지만 임신한 여자 친구 클레오에게 협박이나 하고 제대로 된 판단 없이 정부에 가담하여 마구잡이로 사람을 죽이는 젊은 미스텍 청년 페르민(호르헤 안토니오 게레로)이나, 텔레비전에서 입으로 자동차를 끌며 쇼를 하면서도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는 것이라 떠드는 남자 교수나. 죄다 대지에 발을 딛지 않고 산다. 아스라이 사라지는 저 하늘의 비행기처럼 붕붕 떠서는 책임이라고는 일절 질 줄 모르는 어리석은 남자들. "로마"라는 제목도, 오로지 백인 남성만을 시민으로 간주했던 고대 로마 제국을 어쩐지 비웃는 것 같은 건 아마도 내 기분 탓일 테지.


<로마> 속에서 연대하고 서로 보듬는 이들은 아이, 노인, 여자들이다. 그것도 버림받은 사람들만이 그렇게 한다. 힘없고 버림받은 이들만이 벌거벗은 채 서로의 몸을 부둥켜안고 사랑한다 말한다. 그러니 실상 땅 위의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게 하는 건 건장하고 학력 높은 사람들의 큰 목소리나 과장된 행동이 아니라, 이렇듯 연약하고 미약한 존재들의 끌어안음이다.


인생은 허세와 욕망을 가장한 그럴듯한 쇼로 지탱되지 않는다. 살아 있음은 체감()하는 것이다. 생(生)의 무게는 버티지 않으면 안되는 시간들 속에서 감각된다. 인간의 삶은 중력을 견디는 시간 속에서 이뤄진다. 그러므로 정신으로 육체를 극복하려 하거나 현실을 벗어나 저 너머 이상으로 나아가려는 어떤 남자들의 가상한 노력은 아름답지도 숭고하지도 않다. 그저 미련한 몸부림에 불과하니, 이조차도 그들을 먹이고 입혀서 살리는 손길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하다. 그러니 맨발로 대지를 있는 힘껏 밀어내고 있는 생채기 난 그 몸들을, 상처 입은 맨몸으로 상대의 상처를 보듬는 가냘픈 몸짓들을 기억해야 한다. 보잘것 없는 인간의 삶이 유의미해지는 순간이 여기에 있을 테니까 말이다. 알폰소 쿠아론에게 이태리의 그 유명한 로마보다 멕시코시티의 작은 마을 로마가 더 눈부신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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